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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신모 소서노의 흔적을 찾아서
이 글은 성평등불교연대가 주최하고 불교아카데미와 젠더연구소가 공동주관했던 '불교여성 문화답사'의 자료글입니다. 불교여성문화답사는 역사속에 묻혀있는 관련 유적지 답사를 통해 잊혀진 불교여성의 삶을 알아가기를 통해 여성불자로서의 자긍심을 일깨우자는 취재로 기획된 프로그램입니다. 2018년 4월부터 7월까지 매월1회 진행된 답사를 총 4회로 연재합니다._편집자 주

흔히 백제 하면 공부와 부여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사실 700년 백제 역사에서 전반기 500년은 공주나 부여가 아니라 지금의 서울 송파와 강동 그리고 경기도 하남에서 이루어졌음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역사에서 <삼국유사>나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등의 대표적인 역사서와 지리서들에서는 초기 백제의 도읍인 하남 위례성의 위치를 충남 직산으로 비정해왔습니다.

한성 백제 500년 도읍지

처음 하남 위례성이 지금의 하남 일대라고 주장한 사람은 다산 정약용입니다. 한강 줄기를 따라 하남에서 직선거리로 10리 상류인 남양주 능내에서 살았던 정약용은 그의 저서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한강 인접한 땅의 남북(漢水逼近地 南北) 즉 광주고읍(지금의 하남 춘궁동) 지역이 하남 위례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같은 정약용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였습니다. 한강이 범람해서 마포 일대가 8미터 이상 잠겼다고 하는 최악의 홍수 피해가 을축년 대홍수입니다. 당시 봉은사 주지 나청호 스님은 봉은사 시주쌀을 내놓아 뱃사공을 고용해서 잠실 일대에 살던 주민 800여 명을 구해서 당시 신문지상에 널리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풍납토성

바로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지금의 천호동 서쪽 한강변에서 물길에 휩쓸리고 남은 토성터가 발견된 것입니다. 이후 1963년 이곳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64년 조사에서 초기백제시대의 철기유물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삼국사지> 백제본기 온조조 13년(기원전 6년)의 기록과도 일치합니다.

 “내가 어제 나가 한수 남쪽을 둘러보았더니 땅이 기름져, 그곳에 도읍해 영구히 안정된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 “7월에 한산 아래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 백성을 옮겼다.(予昨出巡觀漢水之南 土壤膏腴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就漢山下立柵 移慰禮城民戶)”

1925년 풍납토성이 발견되고 60년이 지난 1984년, 당시 1988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또 하나의 토성터가 발견됩니다. 올림픽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서울 송파구 방이동 일대를 착공했는데, 공사 도중 토성터와 유물들이 발굴되면서 이곳이 북쪽의 풍납토성과 함께 초기 백제의 도읍인 몽촌토성 터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몽촌토성

 이상으로 볼 때 온조가 건국한 초기백제는 한강 남쪽 지금의 송파, 강동, 하남 일대임이 거의 분명해보입니다. 앞서 온조가 하남 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삼국사기>의 기록 바로 앞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경성에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다. 나이 61세였다.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나라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우리 강역을 침범하기 때문에 편안한 나날이 적다. 하물며 요즘에는 요상한 조짐이 계속 나타나고 국모마저 세상을 떠나셔서 스스로 편안할 수 없는 상태이니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바로 소서노 이야깁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는 <조선상고사>에서 “소서노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대왕일 뿐더러,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사람이다”라고 찬탄을 했습니다. 소서노(召西奴)는 졸본부여의 5부족 가운데 하나인 계루부의 공주였다고 합니다. 동부여왕인 대소에게 쫓겨 졸본으로 온 12세 연하의 남자인 주몽을 만나 혼인을 하고, 그 동안 소금과 특산물 무역으로 모아 둔 재산을 동원해서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주몽이 동부여에서 나오기 전 아내 예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가 아버지인 주몽을 찾아오고, 고구려의 태자로 임명되자 소서노는 자신의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입니다. 큰 아들 비류는 그곳에서 도읍을 정해 비류백제를, 둘째 아들 온조는 지금의 한성백제에 도읍을 정해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소서노로서는 남편인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한 지 10여 년 만에 이번에는 아들을 도와 두 번째 고대국가를 건국한 것입니다. 온조는 어머니 소서노가 죽자 도읍을 옮기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당을 세웁니다. 사당을 세운 장소가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장소가 남아 있지 않지만 아마도 나라의 안녕을 빌었던 한성백제의 진산인 검단산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검단산은 한성백제시대 하남 위례성의 진산(鎭山)으로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산이라고 합니다. 검단산의 '검(黔)'은 고조선의 단군왕검처럼 제사와 정치의 기능을 겸한 제정일치 사회의 우두머리를 뜻합니다. 단군왕검(王儉)에서처럼 '크다, 신성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또한, 단(丹)'은 '제단'이란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검단산'은 '신성한 제단이 있는 산'이란 뜻으로 해석됩니다.

죽어서 백제의 신모(神母)

온조왕은 어머니 소서노가 죽자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당을 세웁니다. 이 사당에 모신 인물이 바로 어머니 소서노였습니다. 소서노는 죽어서 단순히 왕의 어머니가 아니라 나라를 지키는 신모(神母)로 존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서노는 하남 위례성만큼 역사에서 잊혀진 인물이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를 사실상 건국한 주체임에도 우리 역사에서 그녀를 거의 지워버리다시피 한 것은 남성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절개를 지키지 못한 과부, 정실이 아닌 후실부인, 남편을 버리고 가서 따로 나라를 세운 반역자 등 전근대사회에서 용납하지 못할 여성으로서 여러 가지 허물을 한데 가진 인물로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남 시 동쪽에 자리잡은 검단산 아래에는 아직도 동네 사람들에 의해 해마다 음력 10월 초하루에 산신제가 치러집니다. 이곳에서는 독특하게도 해를 걸러 한 해는 할아버지 산신에게 제를 지내고, 다른 해에는 할머니 산신에게 제를 올립니다. 지내는 장소도 다릅니다. 할아버지 산신제는 큰골 골짜기 끝 검단산 중턱에서 지내고, 할머니 산신께는 산 아래 별도의 제단에서 치러집니다.

검단산 여산신제단

 검단산 산신제에서 할머니 산신이 소서노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백제를 지키는 나라의 신모로서 수도 하남 위례성의 진산에서 지내는 여산신제의 주체가 소서노 말고 다른 인물이라고 추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천년 역사의 석탑과 마애불

하남시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재가 있습니다. 먼저 초기백제 또 하나의 도읍으로 꼽히는 이성산성과 고골 주변 동사지(桐寺址)라는 곳에는 3층(보물 13호)과 5층(보물 12호)의 석탑 두 기가 있습니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 탑들은 규모와 모양에서 서울 인근에서 볼 수 없는 빼어난 수작입니다.

하남 동사 3층(보물 13호), 5층(보물 12호) 석탑


1988년 4월부터 7월까지 동국대학교박물관이 실시한 판교~구리간 순환고속도로 발굴조사 때에 ‘동사(桐寺)’와 ‘동사(同寺)’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고, 석탑 서쪽의 금당지에서는 총 54개로 추정되는 주춧돌 중 19개가 발견되어 정면 7칸, 측면 6칸의 대형건물터임을 추측하게 합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과 건물지 등을 종합해 볼 때 백제시대 사찰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석탑 이외에도 금당 안의 불상좌대의 기단부와 목탑지 등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서 도보 30분 거리, 직선거리로 2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는 고려 초기에 중수했다는 마애약사여래불(보물 981호)이 있습니다. 작고 단아한 불상으로 적어도 통일신라시대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불상 왼편에 새긴 명문, “태평이년 정축칠월이십구일 고석불재여사을 중수위금상 황제만세원(太平二年 丁丑七月九日 古石佛在如賜乙 重脩爲今上 皇帝萬歲願)”에서 태평 2년은 송나라 태종 때의 연호로 977년(고려 경종 2년)입니다. 이때 이미 있었던 고불을 중수했다고 하니 이보다 훨씬 이전에 마애불상이 존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교산동 마애약사불(보물 981호) 마애불 옆에 온조왕이 먹었다는 샘물이 솟고 있다.


이 마애불 옆에는 객산폭포라는 작은 물줄기가 있습니다. 그 아래 작은 샘이 ‘온조왕 어용샘’이라고 불리는 샘물로 피부병이 있는 사람이 이곳에서 이 물로 씻으면 잘 낫는다고 합니다. 약사여래불 아래 약효가 있는 샘물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곳을 ‘약정사(藥井寺)’라고 표기하고 있어 옛날부터 샘물이 유명했던 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남 위례성 시대에 온조왕이 먹던 샘물이라면 온조왕뿐 아니라 그 어머니인 소서노도 와서 마셨을 샘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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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사 2018-09-09 07:47:35

    화랑세기를 일본정창원에서 베껴온 남당 박창화의 고구리 창세기와 숨겨진 고구려역사를 찾아서를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조선이후의 사서들은 좀 거시기 할 겁니다.   삭제

    • 풍납동 2018-09-08 10:54:27

      풍납동 사람들 중에는 풍납토성 미워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토성발굴만 아니었다면 토성 밀어내고
      그자리에 아파트 지어 10억 20억 부자가 됐을텐데 하면서요.
      (요즘 서울 아파트 폭등으로)   삭제

      • 혜의 2018-09-08 10:30:05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정사가 야사같기도 하고 야사가 정사같기도 한 이야기입니다.
        백제 이야기가 요즘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올 연말에 복원한 미륵사지 탑을 일반에게 공개하면 탑돌이하러 가려고 했는데
        일정상 올해는 갈 수 없고 내년 겨울에 내가 만난 백제탑 5곳을 선정하여
        겨울순례자가 되어 순례길에 오르고자 하는데 위의 하남동사 탑들이
        시발점이 될 것 같습니다.
        나의 꿈이 몽상으로 끝나지 않기를!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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