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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질문이 살아난다
  • 박태원 울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 승인 2018.09.27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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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학기 개강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진정성 있게 부탁하곤 한다. <강의 중에 언제든지 어떤 내용이라도 기탄없이 질문해 달라. 묻지 말아야 할 금단의 영역은 없다. 내 강의의 모든 것, 내 생각 최초의 전제들을 향해서도 마음껏 물어다오. 그대들의 질문이 나를 키운다.> 

좋은 질문, 날카롭게 파고드는 질문을 언제나 나를 변화시키고 향상시킨다. 새로운 직관의 문을 열고, 얽힌 생각을 정돈하며, 잘못된 관점을 수정하고, 알고 있는 것의 의미와 가치를 더욱 분명하게 확인하게 한다. 학생들의 질문은 나에게 큰 선물이고 행복이다. 좋은 질문과 성실한 대답이야말로 배움터의 생명력이다.

질문한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지닌 희유한 능력이다. 나더러 인간이 지닌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를 골라 한 마디에 담아보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질문하는 존재’라고 말하겠다. ‘질문하는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읽어내려면, 질문이 가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몇 가지 조건들을 주목해야 한다. 언어 능력, 재인지 능력, 갇히지 않는 능력이 그것이다.

인간의 감관은 무수한 차이현상들을 만난다. 그런데 인간은, 어쩌면 지구 행성에서는 오직 인간만이, 유사한 차이들을 언어라는 그릇에 담아 개념으로 묶어 분류하는 능력을 갖춘다. ‘진화연기 시즌1’이라 부를 만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하여 차이들을 언어로 묶는다. ‘인간’ ‘동물’ ‘여성’ ‘남성’ ‘한국인’ ‘미국인’ 등등. 그리고는 개념으로 묶은 ‘유사한’ 차이들을 마치 ‘동일한’ 것처럼 간주한다. 그래야 차이들 간의 대비가 뚜렷해져서 문제 해결력을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유사성’을 ‘불변의 독자적 동일성’으로 처리할 수 있게 하는 언어개념의 속성은 도구적 유용성과 환각의 해악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유일절대신, 불변의 아뜨만·브라흐만, 동일한 정신이나 불멸의 영혼, 동질성을 유지하는 물질의 궁극단위, 독자적 순수본질,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을 변하게 하는 이면 실체 등은 명백히 이 개념의 속성에 기대어 설정한 개념적 존재환각이다. 요청된 허구들이다. 이 허구들은 인간의 지친 삶에 위로와 희망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물질 탐구와 이론수립에 기여하기도 하였지만, 무지와 기만에 의거한 권력과 폭력을 발생시키는 원천이기도 하다. 붓다는 개념허구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개념의 이로움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연 분이다.

차이들을 언어에 묶어 분류하는 능력을 조건으로 삼아, 인간에게는 또 하나의 능력이 발생하였다. 차이들을 언어에 담아 분류하면 차이들이 선명하게 대비되어 지각된다. 그런데 인간은 대비된 그 차이지각들을 다시 인지한다. ‘여성’과 ‘남성’ ‘한국인’과 ‘중국인’으로 대비된 지각을 대상으로 삼아 ‘다시 아는’, 재인지 능력을 보여준다. 이 재인지 능력으로 인해 새로운 경험지평이 열린다. 대비된 차이들에 대한 ‘판단·평가의 지식경험’, 비교와 종합 및 분석을 통한 논리나 이론구성의 ‘법칙적 경험’이 발생한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어떠어떠한 존재이다>라는 식의 지식과 이론을 구성한다. ‘진화연기 시즌2’가 펼쳐진 것이다.

단순한 지각을 넘어 지식과 이론으로써 차이들을 처리할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은 새롭게 진화한다. 생물종 가운데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해결력을 장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조건들을 기반으로 또 하나의 특별한 면모가 추가되었다. ‘질문하는 능력’이 그것이다. ‘진화연기 시즌3’가 개막하였다. 개념에 담긴 차이들에 대한 지식과 이론들에 대해 그 타당성과 진실성, 이로움과 해로움 등을 ‘다시 묻는 능력’을 발현시켰다. ‘질문하는 인간’이 된 것이다. 이제 인간은 이미 구성한 ‘차이에 대한 지식과 이론·법칙’에 머무르거나 갇히지 않고 그것들을 끝없이 수정하고 새로운 것을 추가하게 되었다. ‘성찰’은 이 질문능력의 한 단면이다. ‘질문하는 인간’이 되면서부터 또 다른 차원의 경험지평이 열렸다. 지식·이론과 그 문제해결력이 끝없이 변화하고 고도화될 수 있는 길이 트였다.

‘질문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특히 ‘딛고 있던 것’에 대해 질문하려는 사람이라면 <갇히지 않으려는 의지의 선택과 그에 상응하는 능력의 발휘>가 필요하다. 달리 말해 <지식·신념·이론의 기존 질서와 체계에 안주하지 않고, 더 견실하고 더 좋은 것을 위해, 익숙했던 것을 떠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정신>이 있어야 한다. 거듭거듭 출가하는 정진의 노력이 필요하다. 출가정신의 본령은 여기에 있다.

더 좋은 것을 위해 익숙한 것들과 결별할 수 있는 용기, 차마 놓지 못하여 움켜쥐고 있던 손을 펴서 놓아버리는 이별의 감행. - ‘현재의 거주지에 대해 질문하는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면모다. 몸담고 있던 것에 대한 질문은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며 풀려나게 하는’ 변화를 발생시킨다. <내가 붙들고 있는 이해와 신념은 타당한 것일까?>라고 묻는 순간, 붙들고 있던 이해와 신념으로부터 일종의 ‘거리’ 혹은 ‘간격’이 발생한다. 의지하던 것들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은 그 순간 ‘갇히지 않으려는 용기’를 발휘하는 것이며, 일으킨 질문의 대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갇히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성장한다.  

붓다께서 일러준 해탈의 길은, 해탈解脫이라는 말이 지시하듯, ‘갇히지 않고 풀려나는 능력’을 키워가는 여정이다. 중생 인간이 세상을 읽어내던 문법 전체에서 풀려나는 지점, 그래서 잘못된 문법을 고치는 능력이 완벽해진 지점이 그 여정의 종착지다. 그런데 몸담고 있던 것들을 흔드는 ‘성찰적 질문’도 거주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한다. 그런 점에서 해탈의 여정과 성찰적 질문은 서로를 끌어안는다. 인류가 소중히 가꾸어온 진보의 성찰지성과 해탈의 길은 이렇게 만난다. 경이로운 대목이다. ‘질문하여 풀려나기’를 생명력으로 간수해 온 성찰지성의 행보, 그리고 삶과 세계를 구성해 가는 인간의 문법을 송두리째 괄호치고 ‘만나면서도 풀려나는 지평’으로 이끄는 붓다의 길. - 이 두 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어깨동무해 왔다.

<기존의 언어적 이해질서와 접속하면서도 갇히지 않고, 자유와 평온을 유지하면서, 더욱 온전한 이해를 역동적으로 성취하고 펼쳐가는 지평>에 완전히 올라서신 분, 그리고 인간을 그 지평으로 이끈 분이 붓다라고 생각한다. 서핑을 즐기는 사람은 역동하는 파도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파도가 아예 없는 곳으로 피하지도 않는다. 요동치는 파도와 ‘접속하면서도 빠져들지 않는’ 역량으로 자유와 평온, 즐거움을 누린다. 또한 파도와 접속하고 있기에, 파도의 상태를 항상 살펴 잘 이해한다. ‘삶과 세상’이라는 파도와 ‘만나면서도 풀려날 수 있는 길’은 ‘질문하는 인간’이라야 걸을 수 있다. (‘한국불교 향상포럼’ 2018년 9월 포럼에서 발표한 「깨달음은 순수실재와의 만남인가, 현상과 만나는 새로운 지평의 열림인가?」라는 글에 관련된 생각들이 있다. 향상포럼 블로그에 발표문 전체가 게시되어 있다.)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하여 살아남은 생물종은 모두 과거방식에 안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존 방식에 머무르고 갇힌 생물종은 멸종했고, 과거와의 결별을 선택했던 종들은 진화하여 살아남았다. 인간은 그 진화를 ‘질문’을 통해 구현해 왔다. 질문하는 인간은 향상 진화하고, 질문하지 않는 인간은 퇴행 소멸한다. 안주하고 갇혀버린 인간은 질문하지 않는다. 지식·이론·신념의 과거질서를 익혀 한 자리 차지하려는 사람, 확보한 자기자리 지켜가는 데만 관심 있는 사람은, 질문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의 질문은 기존질서를 잘 수용하기 위한 것일 뿐, 새로운 질서를 향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구질서가 쇠퇴하면 함께 몰락한다. 근본에 대해 다시 질문하는 인간만이 향상 진보한다. 붓다의 길은 ‘제대로 거듭거듭 질문하는 인간’이라야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해탈된 삶과 세상은 그 ‘제대로 질문하여 성취하는 이로움’의 새로운 차원이고 최고 정점이다.

‘제대로’ 질문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할까? 이와 관련한 붓다의 가르침에서 적어도 두 가지는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이롭다>는 것, 다른 하나는 <금단의 영역을 두지 말고 질문하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현재 이 두 가지 조건에 가장 충실한 영역은 과학이고, 가장 부실한 영역은 서구적 전통의 종교이다.

과학은 관찰과 검증이 가능한 문제들에 집중한다. 그리고 모든 주장은 경험적 검증과정에 자신을 전면적으로 공개한다. 누구라도 동일한 관찰방식과 실험에 착수하여 그 주장의 타당성 여하를 검증할 수 있는 절차에 자신을 개방한다. 어떤 주장이라도 과정과 결과는 물론 그 첫 출발지부터 질문의 대상이 된다. 과학 구성원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현재 과학적 주장이 그 어느 영역의 주장보다 신뢰를 받고 탁월한 자기진화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에 비해 서구적 전통의 모든 종교는 ‘경험적 검증이 불가능한 명제’에서 출발하고, 또 그 명제를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세계를 창조한 후 완전하게 관장하는 유일신은 인간이 경험으로 확인할 수 없는 존재이니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질문하지 말라>고 한다. 이 명제는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다. 이것이 흔들리면 그 위에 지은 건축물 전체가 흔들린다. 그래서 이 명제에 대해 질문하고 싶어질 때는 <시험에 들지 말게 하소서>라며 질문의 뿌리를 스스로 잘라버리게 한다. 교리로 확립된 이 질문봉쇄의 성벽 안에 거주하는 것을 전제로 여타의 질문이 허용된다. 다채로운 교리해석이나 논리체계는 질문의 산물이다. 그러나 허용되는 질문 울타리 안에서만 피는 꽃들이다.

경험적 검증의 예외 지대에서 출발하는 모든 형이상학적 주장은 근원적 독단을 안고 있다. 그런 주장들은 경험적 검증을 거부할 수 있기에 허구와 기만의 권력질서를 세워 당당하게 유지해 갈 수 있다. 그럴듯한 명분과 논리의 옷만 걸치면 된다. 모든 종교의 신앙행위에 배어든 ‘주술적 기대를 담은 기도와 의례’, 신비주의도 한 몫 단단히 한다. ‘질문하는 인간’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는 뼛속까지 파고들지만, 고통 받는 인간은 아직도 풀어버리기를 거부한다. 무지의 자학을 즐기는 수준이다. 

붓다 그 분은 이 무지의 잔치판을 뒤엎어버린다. 붓다 자신의 주장, 자기의 모든 것에 대해, 그 어떤 예외도 두지 말고 질문하라고 한다. 타당성 여하를 철저하게 따지고 검증절차를 통해 확인하라고 요구한다. 불가사의할 정도의 자신감이다. 의문을 끝까지 묻는 태도를 구도자의 자격요건으로 칭찬한다. 깔라마 사람들과의 대화를 보라. 어디 그뿐인가. 심지어 임종을 예고하고 사후를 대비하는 동안에도 제자들에게 <의문을 남기지 말고 질문하라>고 요구한다. <질문하라. 예외를 두지 말고 끝까지. 의문이 해소될 때까지!> - 이것이 붓다 그 분이 보여준 스승의 모습이다.

<불교는 어떠한 질문과 실험도 허용하고 끌어안는 넓은 품이다. 울타리 치지 않고 마음껏 놀게 하는, 탁 트여 광활한 대지로 보인다.> - 불교를 접한 서구 지성들의 한결같은 소감이다. 교학의 발달과정이나 불교의 역사는 붓다의 질문 정신을 다양한 형태로 반영해 왔다. 불교가 지닌 생명력이기도 하다. 질문과 대답이 살면 불교가 살았고, 그렇지 못하면 불교가 쇠퇴했다. 또한 교학과 교단이 붓다의 질문정신을 충분히 수용해 오지는 못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질문을 거세하는 장치들은 불교 내부에서도 작동한다. ‘시비하지 말라’ ‘분별하지 말라’는 언어용법에 대한 오해 및 오·남용이 대표적 사례다. 붓다는 모든 언어를 ‘조건적’으로 구사한다. 연기(緣起, 조건적 발생) 통찰을 언어용법에서도 일관되게 관철한다. 고행에 대한 붓다의 비판을 부당하다고 항의하는 고행자들에게, 붓다는 자신의 언어용법을 정확히 이해하면 오해가 풀린다고 응답한다. <나는 ‘무조건’ 고행을 비판한 적이 없다. 해로운 결과를 발생시키는 고행이라면 하지 말라고 하고, 이로운 결과를 발생시키는 고행이라면 하라고 권한다. 나는 모든 말을 ‘조건적’으로 구사한다.>(『앙굿따라 니까야』 ‘왓지야마히따경’)

모든 용어와 문장의 의미는 ‘조건에 따라 생겨난다’는 것이 연기적 언어관이다. 따라서 어떤 말을 할 때 그 의미를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명확히 할수록 연기 지혜에 부합한다. 그리고 이롭다. 듣는 사람도 의미발생의 조건들을 제한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시비하지 말라’ ‘분별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도 ‘조건적으로’ 유효하고, 조건들의 맥락에 따른 제한된 내용을 갖는다. 불교 내부, 심지어 교학에서도 비非연기적으로 처리되는 언어용법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가 ‘시비·분별하지 말라’는 말이다. (‘향상포럼’을 통해 조만간 이런 문제들을 다루어 볼 것이다.) 

<시비하지 말자. 분별하지 말자. 쌍방 모두 참회하고 다툼을 그치자> 등의 말은 분명 삶의 치유와 진리구현과 세상의 해방을 위한 언어들이다. 그러나 ‘질문을 덮으려는 의도’가 뒤섞인 현장에서 이런 말들이 연기적 성찰 없이 구사되면, 질문들을 거세하거나 봉쇄해 버리는 장치로 악용된다. 이런 말들이 유효할 수 있는 맥락과 조건을 명확히 하지 않고 구사하면 문제를 혼란스럽게 하고 해결을 어렵게 한다.

<더 이상 시비 따지지 말자. 다 잘못이 있다. 그러니 모두 참회하고 싸움을 그치자>는 제안에 문제해결의 진정성이 담길 수도 있다. 분쟁과 불화를 그치고 화합의 길을 모색해보자는 것이 그 진정성의 취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제안의 진정성이 ‘질문과 대답을 통한 문제해결’에 얼마나 유효한지는 별개의 것이다. 확보한 조건들과 상황의 맥락에 따라 유효할 수도 있고 장애일 수도 있다. 불의한 자(들)의 입지만 강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게 하는 성찰의 긴장이 필요하다.

분쟁과 갈등, 다툼과 분열은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차이들의 갈등 때문에 향상하고 진보한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끝까지 묻고, 제대로 성실하게 대답하는 과정’을 확보하는 일이다. ‘시비분별 놓기’나 ‘참회’는 제대로 질문하고 성실하게 대답하는데 기여하는 조건이 되어야 한다. 당장의 소란이 싫어서 질문을 거두거나 대충 묻거나 엉뚱하게 대답하는 것으로는 해결도 안 되고 향상도 안 된다. 게다가 불교적이지도 않다.

질문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 붓다의 후학이고 불자다. 제대로 된 질문을 철저히 하고, 그런 질문들에 대해 초심의 진정성으로 성실하게 대답해야 붓다의 길을 걷는 구도자이다. 너와 나의 더 좋은 이로움을 겨냥하면서 연기적 사유로써 묻고 또 대답해야 한다. 화쟁은 그렇게 ‘제대로 묻고 대답하는 능력과 방식’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이고, 그런 과정을 잘 운용해 갈 수 있는 것이 화쟁의 능력이다. 화쟁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현상이다. 묻고 답하는 ‘개인적·집단적 주체’인 ‘주어’에 존재환각을 부여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개인적 화쟁이고, 좋은 질문과 이로운 대답을 상호 ‘조건적이고 역동적으로’ 구성해 가는 과정이 사회적 화쟁이다.    

화쟁의 땅은 다툼 없는 적막강산이 아니다. 화쟁의 꽃은 바람 없는 온실에서 피어나지 않는다. 거센 바람과 험한 풍파 속에서 피어나는 우담바라가 화쟁의 꽃이다. 화쟁은 시끌벅적할 수밖에 없는 만남의 과정에서 수립해 가는, ‘질문과 대답을 통한 소통적 향상’에 관한 것이다. 원효의 화쟁철학도 그런 것이다. 저자거리를 누비며 <크게 편안해 봅시다, 크게 편안해 봅시다>(大安 大安)라며 목탁 치던 대안大安화상과 그의 절친 도반 원효. - 그들은 합세하여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을 토해낼 정도로 아득한 사유수준을 구사했던 인물들이다. 저잣거리 시선의 범주를 맴도는 수준의 운동가가 아니다. 화쟁의 꽃은 그런 수준의 거름을 품은 땅에서 피어야 제격이다.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완전한 인격과 수준을 요구하는 것보다는, ‘제대로 질문하고 성실하게 대답하는 태도’를 요청하는 것이 좋다. 질문과 대답의 주체들이 이미 무아적 인격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런 수준의 인격이 아니라도 ‘마음껏 그리고 제대로’ 묻고 또 응답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대로 묻기와 성실하게 응답하기의 상호작용’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참여자들의 인격이 향상해 간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한국불교에 질문이 살아나고 있다. 다양한 영역에서 불교적 가치의 핵심부를 겨냥하는 질문들이 부쩍 활기를 띠어가고 있다. 특히 한국불교와 조계종 혁신을 둘러싼 좋은 질문들이 살아나고 확대되고 있다. 무엇이 구도자의 자격이고 불교인의 자격이며 교단의 자격인지, 무엇이 해종이고 훼불인지를 빈틈없이 묻는 질문자들의 저변이 넓어졌다. 한국불교가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불교인들을 많이 확보하였다는 것은 큰 진보이고 희망이다. 이 질문능력자들은 계속 늘어갈 것이고, 그에 따라 제대로 된 좋은 질문들도 이어지고 축적될 것이다.

질문의 대상도 교단개혁 의제에 머물지 않고 확장될 것이다. 전통교학(붓다에 대한 과거의 이해)까지도 질문의 대상이 되어 그 장단점이 금기 없이 검토되고 새로움을 추가하면서 통섭될 것이다. 마침내 붓다(들)과 만나는 새로운 큰 장이 서고, 그 장에서는 새로운 명품들이 속속 등장할 것이다. 개인과 사회는 그 명품들을 누리느라 크게 행복할 것이다. 한반도는 그런 장을 열기에 적합한 땅이다. - 설레지 않는가? 이런 전망의 구현에 한 몫 해보는 일이. 인간되어 그런 길 걷다 숨 놓으면 멋진 일 아닌가.    

주목되는 것은 ‘질문들의 연대와 소통 및 확산 현상’이다. 인류문명 최초의 현상이다. 인터넷과 SNS 문명이 결정적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질문이 불편한 세력은 ‘조금 지나면 잠잠해진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질문에 대한 성실한 응답이 나올 때까지 ‘질문의 연대와 확산’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문명조건이다. 이 점을 간과하고 예전 버릇처럼 묵살전략을 택한다면, 조만간 ‘질문과 응답의 장’에서 퇴출될 것이다.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들’ 앞에서 ‘대답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설 자리가 없어지게 마련이다.

인터넷과 SNS 문명은 인과법칙의 새로운 양상도 구성해낸다. 예전 같으면 인과관계로 이어지지 않았을 현상들이 선명한 인과관계로 결합되고, 강하고 신속한 인과적 현상을 발생시킨다. 예전이라면 개인적 범주에 머물 수 있었던 사유수준과 행적이, 행동(身)과 언어(口)와 생각(意)의 수준이, 언제든지 얼마든지 사회 대중의 시선에 노출된다. 그리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예전에 목격할 수 없었던 영욕의 과보현상이 신속하게 발생한다. 횡재 같은 복을 받기도 하고 재앙 수준의 화를 입게도 되는 인과현상이, 새롭고 빠르고 강력해졌다.

모든 대화가 상호적이듯, 질문은 응답이 있어야 성공한다. 한국불교는 아직 질문에 상응하는 대답들이 빈약하다. 특히 작금의 불교개혁 의제와 관련하여 성실하게 대답해야만 할 관련자나 집단이 응답을 하지 않는다. 구질서와 그 이익체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질문들에 대해, 침묵하거나 엉뚱한 대답을 내놓거나 묵살하려는 태도가 교단 권력을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음험한 자기복제를 꾀하고 있다. 특히 출가자 구성원들 가운데 제대로 질문하고 성실하게 응답할 수 있고 또 기꺼이 응답하려는 인물들은 교단 내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배제된다. 심지어 응징 당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질문하는 사람들의 일이 더 많아진다. 줄기차게 질문해야 할 뿐 아니라, 대답하지 않는 이들에게 대답을 이끌어내야 하고, 응답하려는 사람들을 지원해야 한다. 예전 같으면 쉽게 지칠 일이다. 그런데 환경과 조건이 새롭다. ‘질문의 연대와 지속적 확산’이 가능한 환경을 만났고, 질문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넓고 깊어졌다. 구질서를 방어하려는 자들은 이 새로운 시절인연을 직시해야 한다. 성실하게 응답하면 과거허물도 치유되고 구도자의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불교가 부흥한다.

불교개혁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 성실하고 알찬 응답이 이루어질 때 일어날 일은 예측이 어렵지 않다. 한국불교 내부의 활력은 물론이거니와 한국불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호응 역시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 된다. 한국불교가 도약의 전환기에 접어든다. 눈앞에 차려진 성찬이다. 누가 이 성찬을 걷어차 버릴 것인가? 업경대(業鏡臺)라는 말은 행위에 대한 사회적 기록과 평가 장치에 대한 요청을 반영하고 있다. 이 업경대의 역할을 이제는 포털사이트의 검색창이 너끈히 해낸다. 이름과 사건을 입력하면 언제든지 줄줄이 출력되어 사회적 평가의 대상이 된다. 행위에 대한 사회·역사적 평가를 영속시켜가는 문명의 인과법칙 구현장치이다. 이 현대판 업경대는 누구의 어떤 행위가 훼불이고 해종이었는지, 해와 달이 자리바꿈 하는 동안은 빠짐없이 전할 것이다. 구도자가 되어 소탐대실의 모범사례로 등재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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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비 2018-09-28 16:06:12

    좋은글입니다. 보언하고 싶군요.
    "<더 이상 시비 따지지 말자. 다 잘못이 있다. 그러니 모두 참회하고 싸움을 그치자>는 제안"이 참이 되려면

    1. 타인에 대한 강요나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
    2. 권력을 지니고 시비에 대한 책임이 분명한 자, 혹은 그들을 옹호하는 자가 아닌 약자와 소수자가 말할 때

    이 이외의 시비분별 하지마란 소리는 다 개소리입니다.   삭제

    • 논쟁종교 2018-09-28 02:08:44

      불교는 무조건 믿어라 의심하지 말라는 맹목감성종교와는 완전 반대로 묻고 대답하며 소통하고 논쟁하는 지성의 종교다 이런 과정이 없어면 깨달음도 없다 불교인들이 구습의 기복에 젖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승려도 마찬가지다 눈앞의 욕심뿐이다   삭제

      • 씁쓸 2018-09-27 23:49:10

        질문 하라면서
        책에서 보고 배운 지식속의
        자기 아는 유식한 단어들은 죄다갔다 붙여놓고
        질문 하라네.ㅋㅋ. 끼리 끼리 놀겠단 애기갔네.어쨋건 하도 어려운 말들이라..ㅜㅜ
        난 무식해서 질문하라니 질문 하나만 합시다.
        당신은 왜 사는거요?
        돈은 많이 벌었소?
        돈버니 행복 합디까?
        책에서 본거 말고...당신 생각한번 들어봅시다.
        꿰 맞추지 말고..그래도 명색이 철학박산데
        답변 기둘리 뿌러~~!!!   삭제

        • 불자 2018-09-27 16:30:41

          아무데서나 무조건 감정에 의지하여 '좋은 게 좋다'는 인심 아닌 인심(몸사림)의 남용이 화합을 위한 화합 강요로 일상생활에서 부지기수.   삭제

          • 제 3 자 2018-09-27 16:18:09

            주의 깊지 못하고, 조금의 불편을 참지 못해 더 힘들었던 신도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았던 불광사 불교대학 성명서를 냈던 교수라는 분들이 좀 세심히 읽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불광 신도들을 넘어 모든 적폐청산을 눈물겹게 외치면서 행동하던 많은 사람들을 가슴으로 진정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나설 이유도 필요의 의무도 없지만 적어도 가슴으로 그 외침들을 진정으로 들었다면 그리 가볍게 그런 성명서 발표는 못했을 겁니다. 물론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신중했다고 할테지만 제 3자가 보기에는 자신들이 우선해보여 실망이 컸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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