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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에 담긴 불순물
  • 류상태 목사, 종교자유정책연구원 대표
  • 승인 2018.09.29 12:02
  • 댓글 8
기독교 성경 이미지. 불교포커스 자료사진.

독자들에게

처음 이 칼럼을 맡게 되었을 때, 불자님과 기독교인 뿐 아니라 이웃종교인들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면 결국 기독교에 대해 변명하거나 설명하는 글로 귀착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제가 기독교 이외의 종교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이론을 넘어 체험이고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 대해 깊은 감동과 매력을 느끼기는 하지만, 기독교인인 제가 불교를 알아야 얼마나 알겠습니까. 하여 이웃종교에 대해 감히 언급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또 하나는, 기독교에 대해 변명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저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의 무례한 언행이 드러날 때마다 “기독교의 원형은 이런 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마음 깊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자님들에게는 ‘변명’을, 또한 혹시라도 이 글을 읽게 될 기독교인들에게는 ‘설명’을 자꾸 하게 되나 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제가 해야 할 역할 같기도 합니다. 이웃종교인들에게 기독교를 정확히 알리는 것과, 기독교인들에게도 조직 안에 있는 신학자나 직업종교인들이 말하기 어려운 진실을 알려주는 것은, 다종교사회에서 종교간 이해와 상생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1. 이상한 교회의 이상한 짓

지난 8월 25일, SBS TV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과천 은혜로교회 문제를 다루었다. 이 교회 담임목사 신옥주는 ‘타작마당’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교인들로 하여금 서로의 뺨을 때리게 했다. 어머니와 딸이 함께 나와 서로의 뺨을 때리는 끔찍한 장면이 TV 화면을 통해 고스란히 방영되기도 했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납득하기 어려운 이런 행동이 버젓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기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신옥주는 그것이 “성서의 기록에 따른 신앙행위이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기에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그가 근거로 내세운 성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누가복음 3:17)

이 내용은 예수 이전의 마지막 예언자로 알려진 ‘세례 요한’이 예수에 대해 증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이 최후 심판의 날에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여 의인은 곳간(천국)에, 죄인은 지옥에 보낼 것이라는 예언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신옥주는 이 성서 내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지옥을 면하고 천국에 가려면 죄를 짓게 하는 마귀를 쫓아내야 하는데, 은혜로교회가 시행하는 ‘타작마당’이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행위라고 합리화하고 있다.

또한 이 교회는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를 낙토(지상의 천국)라고 주장하며 교인들 4백여 명을 대거 이주시키고, 그의 아들에게 경영을 맡겨 사업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교인들 일부는 그곳을 탈출하기도 했지만, 인터뷰에 응한 교인들은 무임으로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여전히 그곳을 낙토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은혜로교회는 개신교 주류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소위 ‘보수정통’이라는 교회들 중에도 상식에 어긋나는 ‘비합리’를 ‘초합리’로, ‘비과학적’인 것을 ‘초과학적’ 현상이라고 주장하며 기이한 행동을 보이는 교회들이 적지 않다.

‘정통’과 ‘이단’을 가리지 않고 집단중독 상태에 빠져드는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이용하는 교리가 있다. 바로 ‘성서무오설’이다. 경전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는 건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지만 “우리 종교 경전은 완전한 진리의 보고이며, 그 안에 오류는 전혀 없다”고 믿어버리면 그때부터 교인들은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종교사기꾼의 노예가 될 수 있다.

2. 시공의 한계로부터 자유로운 경전은 없다

만약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한반도에 태어나셨다면 그의 탄생설화에 코끼리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호랑이나 곰이 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거룩한 종교경전이라도 시간과 공간의 테두리 안에서 태동하고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경전을 연구할 때는 반드시 text와 함께 context(본문이 기록된 시대와 사회적 배경)에 대한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종교 경전도 다른 고전과 마찬가지로 당시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기에 시공의 한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공을 초월하여 문자 그대로 절대 진리를 담고 있는 종교 경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경전은 순금이 아니라 금광석과 같다. 자연 상태에서 순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금광석에서 순금을 얻으려면 용광로에 넣고 펄펄 끓여 불순물들을 모두 걸러내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와 같이, 경전에서 순수한 신(또는 하늘, 진리)의 말씀을 들으려면 종교학과 신학의 철저한 비판과 검증을 거쳐 불순물들을 가려내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러니까 경전을 통해 신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싶은 사람은, 그 경전 안에 불순물이 섞여있다는 사실부터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대와 공간의 한계, 저자의 인식의 한계로 오늘날에는 명백하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내용들이 종교 경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경전 안에는 독극물도 들어 있다. 저자나 종교조직체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끼워놓은 것들인데, 이런 경전 안의 독극물은 신도들의 신앙과 삶에 심각한 해를 끼친다. 이 모든 불순물을 이성과 과학에 의해 걸러낸 후에야 비로소 경전을 통해 거룩한 하늘의 말씀(또는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기독교성서는 천지창조 이야기부터 서술된다. 그 순서를 보면, 첫째 날 신이 땅과 하늘을 만들고 낮과 밤을 구분한다. 둘째 날에는 하늘과 땅을 나누고, 셋째 날에 땅과 바다를 나누어 땅에 식물이 자라게 한다.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들었고, 다섯째 날에 동물을, 여섯째 날에 비로소 사람을 만들어 창조의 과업을 완성한다.

이 순서에 따르면, 태양보다 지구가 먼저 존재한 것이 된다. 천체는 지구의 부속물에 불과하다. 이 기록은 명백하게 과학적 사실과 배치된다. 그렇다고 거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시 시대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고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직하게 기독교성서에는 시대적 한계에 의한 오류가 있다고 당당하게 인정하는 것이 어떨까.

기독교성서를 예로 들었지만, 시대와 공간의 한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종교경전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게 믿는 것이 순수하고 온전한 신앙일까? 아니면 맹신으로 가는 지름길일까?

3. 기독교성서에 담긴 독극물

내가 전에 쓴 칼럼 <살불살조와 살신살서>에서 엘리사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 중요한 이야기이므로 다시 한 번 간추려 소개하고 싶다.

신의 사자 엘리사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대머리였던 그를 보고 아이들이 놀려대자 엘리사는 신의 이름으로 저주하여 숲 속에서 곰을 불러내어 아이들 42명을 몰살시켰다. 엄연히 기독교성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이 경전에 기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정말로 신이 허락한 일이라고 철석같이 믿어버리면 인간의 이성은 설 자리가 없어지고 신도들의 삶은 처참하게 파괴될 수 있다.

이 기록은 불순물일 뿐 아니라 독극물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이 기록은 당시 사제계급이 피지배계급을 통제하기 위한 불순한 의도로 경전에 끌어들였을 가능성이 높고, 지금도 일부 직업종교인에 의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경고성 메시지로 자주 인용되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사도행전 5장)도 부도덕한 직업종교인들에 의해 자주 인용된다. 교회가 막 태동되던 시기, 그러니까 성서 기록에 의하면, 예수가 십자가형을 언도받고 돌아가신지 불과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 담긴 속셈을 제대로 읽어내려면 4장 끝부분부터 읽어야 한다. 거기에는 초기 기독교공동체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자발적으로 자기 소유를 내놓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공동체, 그야말로 공산주의적 이상이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진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확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며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신도들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 (공동번역성서, 사도행전 4장 32~35절)

원시 기독교회가 막 형성되던 시기, 예수의 공동체는 그렇게 사유재산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상태로 들어갔다고 본문은 말한다. 제도적으로 강제하지 않았음에도 신도들은 각기 자기 소유물을 팔아 사도들(예수의 직제자들)의 발 앞에 바쳤고 사도들도 그것을 공평하게 교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라면 참 좋았겠다. 그런데 5장에 들어서자 반전이 일어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내 삽피라와 함께 자기 땅을 판 다음 의논한 끝에 그 돈의 일부는 빼돌리고 나머지만 사도들 앞에 가져다 바쳤다. 그 때에 베드로가 그를 이렇게 꾸짖었다. "아나니아, 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 판 돈의 일부를 빼돌렸소? 팔기 전에도 그 땅은 당신 것이었고 판 뒤에도 그 돈은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오? 그런데 어쩌자고 그런 생각을 품었소? 당신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 이 말이 떨어지자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 거꾸러져 숨지고 말았다. 이 말을 들은 사람마다 모두 두려워하였다. 젊은이들이 들어와 그 시체를 싸가지고 내어다 묻었다.

세 시간쯤 뒤에 그의 아내가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들어왔다. 베드로가 그 여자를 불러놓고 "당신들이 땅을 판 돈이 이게 전부란 말이오?" 하고 묻자 "예, 전부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어쩌자고 당신들은 서로 짜고 주의 성령을 떠보는 거요? 자, 당신의 남편을 묻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지금 막 문 밖에 왔소. 이번에는 당신을 메고 나갈 차례요." 하고 베드로가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도 당장 베드로의 발 앞에 거꾸러져 숨지고 말았다. 그 때 그 젊은이들이 들어와 보니 그 여자도 죽어 있었으므로 떠메고 나가 그 남편 곁에 묻었다. 온 교회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이 말을 듣고는 모두 몹시 두려워하였다. (공동번역성서, 사도행전 5장 1~11절)

4장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초기 기독교공동체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에 굳이 이 무시무시한 내용이 덧붙여진 이유가 무엇일까? 자기 소유를 모두 내놓기에는 믿음이 연약했던 동료를 껴안지 못하고 내쳐버린 본문 속 베드로의 행태는, 나약하고 못난 민중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안아주셨던 그의 스승 예수가 보인 행보와는 너무나 다르다.

억지로 당시 교회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교회는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했다. 뜻 있는 사람들만 모였을 뿐 아무 것도 없는 연약한 조직체다. 조직이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치된 마음과 신앙이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 돈도 필요하다. 하여 이들 부부의 소심함과 연약함이 조직 전체에 전염될까 두려워 무리수를 둔 게 아닐까.

하지만 이 이야기는 실재했던 사건이 아닐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도행전의 저자(또는 그것을 편집하고 완성한 교회공동체)가 의문사 또는 돌연사한 부부의 이야기를 (공동체의 단결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그렇게 해석하여 사도행전이라는 기록물 안에 끌어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게 아니라 정말로 성령님께서 성서 본문 그대로 행하셨다면 나는 기독교와의 인연을 당장 끊을 것이다.)

물론 이 내용을 기록한 저자(또는 공동체)는 훗날 이 내용이 성서라는 책 안에 수록되어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만일 알았다면 감히 이런 꼼수를 부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4. 경전이 절대권위를 갖게 되면 사람은 노예가 된다

오늘날 기독교신학의 논쟁점은 ‘신의 유무’가 아니라 ‘신에 대한 이해’에 있다. 현대 신학자 대부분은 기독교성서가 묘사하는 배타적 유일신을 믿지 않는다. 현대신학에서 유일신이란, 감정과 의지를 갖고 인간세상에 일일이 간섭하는 인격신이 아니라 ‘궁극적 실재(ultimate-reality)’로 정의된다.

그 궁극적 실재는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닐 수 있다. 초인격적 존재, 혹은 존재의 범주를 넘어 ‘절대 질서’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유교나 도교에서 말하는 이(理)나 기(氣), 도(道), 불교에서 말하는 법(法)과 같은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불교의 연기법이야말로 현대 신학자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궁극적 실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격적 유일신을 믿지 않지만, 나 역시 기독교인이기에, 기독교 용어인 ‘하나님의 말씀’이 경전에 담겨있음을 믿는다. 하지만 내가 정의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유익하고 옳은 말씀”이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기독교성서에도, 불교성서(불경)에도, 이슬람성서(꾸란), 도교성서(도덕경), 유교성서(사서삼경)에도 담겨있다. 뿐만 아니라, 인류가 간직해온 여러 고전에도, 이름 없는 농부의 깨달음에도 담겨있을 수 있다.

하여 사도행전 4장 후반부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5장으로 넘어가는 순간, 이 기록은 성서에 담긴 불순물을 넘어 독극물일 수밖에 없다.

이 무시무시한 기록이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사나운 이야기가 신도들의 자유로운 신앙과 선택을 방해할 뿐 아니라, 너무나 자주 부도덕한 직업종교인들에 의해 도용되었다는 점이다. 과천 은혜로교회도 이 구절을 인용하여 교인들의 돈을 갈취했다. 이제 종교지도자들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내용은 성서에 담긴 불순물입니다” 라고.

그러면 경전의 권위가 추락하지 않겠는가 하고 염려할 수 있겠다. 경전의 권위가 추락하면 어떤가. 아니, 경전의 권위는 ‘완전무결’을 말하는 지금보다는 반드시 추락해야 한다. 예수가 말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경전도, 종교도, 사람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것 자체가 절대권위를 갖게 되면 사람은 그것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기독교가 말하는 ‘우상’이 되는 것이다. 그 우상에서 벗어날 때 ‘경전의 권위’는 추락할지라도 ‘경전의 가치’는 오히려 살아나게 될 것이다.

5. 경전의 문자를 넘어 의미를 읽자

가정해 본다. 만약 불교가 경전무오설에 휩싸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역사의 결과는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경전의 해석을 놓고 정통과 이단이 발생했을 것이고 큰 갈등도 겪지 않았을까. 어쩌면 유럽의 30년 전쟁처럼, 서로 정통이라 자처하며 상대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여 큰 전쟁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교에는 경전무오설이 없다. 절대적인 그 무엇이 없다. 오직 연기법, 인과의 법칙만이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경전도 방편일 수 있고, 부처님조차 방편일 수 있는 종교가 불교다. 오늘날 현실 불교공동체가, 그리고 일부 출가자들이 온갖 뻘짓을 벌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불교에 대한 향수 또는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유일신종교인들이 불교의 살부살조 정신을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경전을 방편으로 삼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이, 살신살서(교리에 매인 신도 죽이고 경전도 재해석)하고, 살예살바(교리의 예수도 죽이고 바울도 죽이는)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경전무오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일신종교인들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하고 싶다. 성서와 꾸란의 문구를 뚫고 들어가 그 안에 담긴 속뜻을 읽자. 뿐만 아니라 그 책들 안에는 시대와 저자의 한계로 인한 불순물도 들어있음을 기꺼이 인정하자. 그리고 경전을 이성과 과학에 의해 재해석하자. 그래야만 지구마을에서 종교로 인해 발생하는 억압과 폭력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쫓/겨/난/목/사/의/부/처/님/사/랑
불교포커스 여시아사(如是我思)

기성 교단에서 쫓겨난 목사는 불교에 늘 미안한 마음입니다. 일부 독선적인 개신교인들이 불교에 저지르는 무례 때문입니다. 또 마음 한편에는 "기독교의 참 모습은 저게 아닌데"라는 아쉬움이 항상 남아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불교포커스>의 지면을 빌려, 그간 하고 싶었던 속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보려 합니다.

2004년 대광고에서 교목실장으로 재직하던 류상태 목사는 당시 예배선택권을 주장하며 46일간 단식에 돌입한 강의석 학생을 지지하며 학교 측의 부당함에 맞서다 퇴직당한 전력이 있다. 이후 생활을 위해 노점상, 택배, 대리운전 등을 전전하면서도 기독교의 본 모습을 알리기 위한 목회활동, 글쓰기 등에 매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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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재문 2018-11-18 07:58:46

    네가알면 얼마나 아니
    넌 기독교에 대하여 십만분의 일도 몰라
    고깟 지식으로 기독교를 평하냐
    불쌍하고 가련하구나
    분명한것은 너도 하나님앞에서 죄를 범하고
    너로 인하여 댁글 다는 형제들까지 죄를 범하게 하는구나
    너가 믿든 안믿든 지옥과 천국은 존제한다
    뿐만아니라 죄의 댁가가 너는 물론 네 후손들에게까지
    하나님은 벌하신다
    후해 하는자 미련하다고 했다
    후해 하는자 지말라   삭제

    • 선공덕 2018-10-06 12:42:25

      <이 글은 동일한 IP에서 중복 작성된 글입니다.>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이시며 참된 불법을 행하시는 수행자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비오는 토요일 선지식 말씀을 글로 접하여 마음이 정화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_()_   삭제

      • 달마 2018-10-01 05:46:51

        선승 같은 목사님이시네요 !
        21세기의 종교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이라는 껍데기에 매몰되지 말고
        그 핵심인 지혜와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삭제

        • ? ? ? 2018-09-30 08:49:14

          지구를 창조할 실력이 있었다면 지구를 천국으로 창조했을터
          자동차도 핸드폰도 돈도 등등 다 창조했을터

          유대인이 신성모독죄로 처형한 것이 인류를 위한 대속이라니
          인류를 위한 대속은 콧털 하나 뽑아 대속하면 될것을 끔찍하고 잔인한 짓을

          로마시대 끔찍하고 잔인하게 못박아 죽인 인간이 수없이 많을터

          불신과 맹신을 키워가는 것은 잘못된 것   삭제

          • 불순물은 2018-09-29 14:10:58

            누군가 넣은 인위적이지
            연기법 저체를 말하는건 아니겠지요?
            직업중이나 환경에따른 해석은
            밥묵고 살거나 나와바리를 지키려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의도에 있는것이고
            윤회는 오직 스스로의 영력에 의할뿐이죠.
            영력이 약하면 반딧불이나되고
            강하면 스따린이나
            모택동이가 대는거겠죠?
            선악은 처한이의 입장일 따름이죠?   삭제

            • 불교가 평화의 종교? 2018-09-29 12:21:27

              동남아 역사를 보면 같은 상좌부 불교국가끼리 서로 침략하고
              상대국 스님 불자 잡아다 학살하고 노예로 삼고
              상대국 사탈 불탑 불상 파괴했다는 내용이
              여행안내 가이드에조차 버젓이 나와있고
              지금도 미얀마 불교계는 우리나라의 종정이나 총무원장급 스님이
              대놓고 로힝야족 학살하자 하고 수많은 스님 재가들이 동조하는데
              어떻게 불교가 평화의 종교라 할수 있나요?   삭제

              • 아래글에 덧붙여서 2018-09-29 12:17:14

                아 또 있네요
                비구독재 위해 넣어놓은 비구니 팔경계나 재가자 차별 구절은 또 얼마나 많고요   삭제

                • 불자 2018-09-29 12:16:00

                  불교도 기독교보다 덜 드러나서 그렇지
                  소의경전 무오류 조사 무오류 소의수행법 무오류가 말도 못하게 많고
                  자기 계파는 정법 다른 계파는 해종으로 몰기위해 넣어놓은 구절이 얼마나 많나요?
                  심지어 후대 힌두교나 동북아 민속신앙에서 따온 윤회 환생 지옥개념 등등도 얼마나 많은데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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