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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한글을 자유자재로 쓴 여성, 조두대불교여성의 삶 알아가기_2

이 글은 성평등불교연대가 주최하고 불교아카데미와 젠더연구소가 공동주관했던 '불교여성 문화답사'의 자료글입니다. 불교여성문화답사는 역사속에 묻혀있는 관련 유적지 답사를 통해 잊혀진 불교여성의 삶을 알아가기를 통해 여성불자로서의 자긍심을 일깨우자는 취재로 기획된 프로그램입니다. 2018년 4월부터 7월까지 매월1회 진행된 답사를 총 4회로 연재합니다._편집자 주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만든 소이는 그 자체가 살아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이었습니다. 극중에서 말 못하는 궁녀였던 그는 훈민정음 해례를 통째로 외워 한글 창제를 방해하는 밀본의 눈을 피해 결국 세종으로 하여금 훈민정음을 반포할 수 있게 한 극적인 장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소이 역의 실제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조두대입니다.

조두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처음 입에서 입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한글 서예가들에 의해서입니다. 한글서체는 처음에 용비어천가에서와 같이 한자의 전서체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던 것이 석보상절이나 월인천강지곡에서는 한자의 해서체에 가까워지고 이를 직접 쓰면서부터는 점차 한글 필기체 곧, 궁체로 굳어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초창기 이 궁체를 처음 쓴 사람 가운데 하나가 조두대였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한글이 쓰이기까지

한글이 세종 이후 현재 우리에게까지 이어지는 데 있어서 불교와 여성의 역할은 지대했습니다. 창제 과정 자체에서 신미대사를 비롯한 학열, 학조 등의 승려들과 정의공주, 인수대비, 조두대 등 여성들이 참여했습니다. 세조가 만든 간경도감에서 불경언해사업을 할 때도 이들은 거의 그대로 참여합니다. 간경도감이 설치되고 최초의 번역서였던 능엄경에는 세조가 직접 쓴 다음과 같은 발문이 붙어 있습니다. 또한, 이 발문에는 번역 과정과 담당자의 이름이 그대로 적혀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상(세조)이 한문에 토를 달고 혜각존자 신미대사가 토를 단 문장을 확인하면, 수빈 한씨(후에 인수대비)가 소리 내어 읽으며 교정하고 한계희, 김수온이 그것을 들으며 번역하여 적는다. 박건, 윤필상, 노사신, 정효상 등이 번역된 문장을 서로 고찰해보고 영순군 부(광평대군의 아들)가 예(例)를 정하며, 조변안과 조지가 한자에 동국정운에 따른 운을 적고 신미와 사지, 학열, 학조 스님이 잘못된 번역을 고치면 최종적으로 세조가 보고 난 후 조두대가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 《능엄경언해》 권10 어제(御製) 발문 중에서

새로 만들어진 글자를 처음부터 잘 읽고 잘 쓸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간경도감에서 경전을 번역했던 사람들은 창제 과정에서부터 관여했던 사람들이 아닌가 추측하게 됩니다. 세조 자신을 포함해서 번역과정에 참여한 사람이 모두 16명인데, 이중 승려가 4명이요 여성이 2명입니다. 여기에도 조두대의 이름이 보입니다.

조두대의 능력은 당시 글을 쓸 수 있는 또 다른 여성이었던 인수대비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인수대비는 자신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교재인 《내훈(內訓)》의 발문을 조두대가 쓰도록 맡긴 것입니다. 왕대비가 직접 쓴 책의 서문을 쓸 정도의 능력을 인정받은 전무후무한 전문여성이 조두대였던 것입니다.

노비에서 상궁으로 수직 상승한 신분

조두대는 본래 광평대군의 노비였다고 합니다. 광평대군은 세종의 다섯 번째 아들로 세종이 몹시 총애했습니다. 한글이 창제되기 2년 전인 1441년 한 해에만도 세종은 광평대군의 집을 6차례나 거둥하는데, 이때 노비 조두대를 만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는 노비 출신으로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종3품 서사상궁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세종에서 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여섯 명의 왕이 재위하는 동안 왕실에 살며 초반에는 세종과 세조, 광평대군 등을 도와 한글 창제과 불경 번역에 일조했고, 후반에는 정희왕후와 인수대비를 도와서 정사(政事)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두대는 세조가 신미대사를 만나러 상원사에 갔을 때도 대동하고 갔습니다. 이때 훗날 선조 때 월정사 사고(史庫)가 만들어지고 이를 지키는 암자로 지정되는 영감암(靈鑑庵)이 이미 그곳에 있었는데, 쇠락한 모습을 띠었다고 합니다. 이를 보자 조두대는 단독시주로 이 암자를 중수하기도 했습니다. 영감암은 함허득통 스님이 불상 대신 나옹 화상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주석했다는 암자입니다.

나옹-무학-함허-신미-허응당 보우로 이어지는 법맥은 조선 초기 왕실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고 보입니다. 상원사 문수동자상을 만들어 시주한 사람도 세조의 딸 의숙공주(懿淑公主)와 그의 남편 정현조(鄭顯祖)이고, 광평대군의 부인과 아들 영순군의 부인 모두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어 뒤에 봉은사가 되는 견성암을 크게 불사하기도 했습니다.

조두대는 불교, 특히 나옹-무학-함허-신미-보우로 이어지는 스님들과 왕실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읽었던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성종 13년에 정희왕후가 별세하고 인수대비의 비호 속에 여전히 영향력을 누리던 조두대도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성종 때 폐비가 된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위될 때 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제거했던 이른바 갑자사화(甲子士禍)의 광풍이 몰아치면서 조두대는 연산군에 의해 그 주모자로 지목되기에 이릅니다. 양주에 있던 그의 묘는 파헤쳐지고 조두대 자신도 부관참시를 피하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그의 양자와 형제까지 죽임을 당하고 재산은 몰수되며, 살았던 집은 물에 잠기게 하고 집과 버려진 시체 주변에는 비석을 세워 죄목을 새기게 했습니다.

보타사 마애불(보물 제1828호)

“두대(豆大)는 궁액에 오래 있어 여러 조정을 섬기매 은총에 의지하여 그 음사(陰邪)를 마음껏 하여 곤극(坤極)를 위태롭게 하고자 꾀하여 엄(귀인 엄씨), 정(귀인 정씨)에게 붙어서 참소와 모함이 날로 심하여 큰 변을 가져왔으니, 그 죄악을 헤아리면 위로 종사(宗社)에 관계됨이라, 이에 명하여 부관하여 능지하고, 그 양자(養子)와 동기를 결장하고 그 재산을 적몰하고 그 집을 저택하고 돌을 세워 죄악을 적게 하여 후세의 불궤를 꾀하여 무리지어 악행하는 자를 경계하노라.” - 연산군 10년 갑자(1504) 6월 28일

세종과 세조 때 한글 창제와 보급에 도움을 주고 한글을 최초로 자유자재로 읽고 썼던 여성, 조두대는 그렇게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살았던 집도 없어지고, 죽어서 묻혔던 묘마저 파헤쳐져서 그가 살았던 흔적은 어느 한 곳에라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기록 속에서 그가 노비로 살았던 광평대군의 사가가 보제원 북쪽이었음을 알 수 있어 지금의 안암동 개운사, 보타사 주변을 거닐며 실낱 같이 남은 흔적을 되짚어볼 따름입니다.

 

황/찬/익/의/발/끝/으/로/생/각/하/기
불교포커스 여시아사(如是我思)

산중의 한 스님이 일러준 말이 있다. “생각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여. 발끝으로 하는 거지” 그 말 가슴 깊이 간직하고 죽는 날까지 산에 오르고 싶다.

근 20년 동안 절밥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산과 가깝게 지내게 되고, 십수 년째 산을 다니며 그 산에 자리잡은 절이나 골짜기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옛이야기들에 관심 갖고 귀에 담아 두었다. 산과 절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찾아 글로 남기는 일에 한 동안 계속 매진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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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불교 2018-10-07 04:27:00

    한글창제포함 조선불교사를 복원하는 것이 현재의 불교를 이어가는 것인데 파계승들이 종단을 장악해 수십년간 불교가 먹칠하고 있다   삭제

    • 혜의 2018-10-06 17:20:51

      조선의 불교사와 여성사는 늘상 나의 한숨을 자아대도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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