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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에서 바우덕이를 만나다불교여성의 삶 알아가기_3

 

이 글은 성평등불교연대가 주최하고 불교아카데미와 젠더연구소가 공동주관했던 '불교여성 문화답사'의 자료글입니다. 불교여성문화답사는 역사속에 묻혀있는 관련 유적지 답사를 통해 잊혀진 불교여성의 삶을 알아가기를 통해 여성불자로서의 자긍심을 일깨우자는 취재로 기획된 프로그램입니다. 2018년 4월부터 7월까지 매월1회 진행된 답사를 총 4회로 연재합니다._편집자 주
안성 청룡사 대웅전

“서울 이남에 무당 같으면서도 무당이 아니고, 광대 같으면서도 광대가 아니고, 비렁뱅이 같으면서도 비렁뱅이가 아닌 자들이 있어, 떼 지어 다니면서 음란한 짓을 하고 있다. 부채 하나 손에 쥐고서 장터를 만나면 연희를 하고, 집집 문전을 따라다니며 노래를 불러 남의 옷과 음식을 도모하는데, 방언에 이를 일컬어 ‘사당(社堂)’이라고 하며, 그 우두머리를 일컬어 거사(居士)라고 한다. 거사는 단지 소고를 두드리며 염불만 하고 사당은 오로지 가무만을 하지 않고 남자를 농락하는 것으로 그 재능을 삼는다. 매양 훤한 대낮,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남자의 입술을 깨물고 손을 끌어당겨, 온갖 꾀로 돈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보통 예사로 여기고, 얼굴은 조금도 붉어지지 않는다. 대개 생명의 유(類)들 중에 가장 극히 추하고 더러우며, 천리와 인도를 상실함이 이 무리보다 심한 자가 없다.” - 《이옥 전집》 〈봉성문여(鳳城文餘)〉 중에서

정조 임금 때 문체가 전통적인 고문체가 아니라 잡문이라는 이유로 관직에서 쫓겨난 이옥이 합천의 옛 지명인 봉성에서 보고 겪은 것들을 엮은 <봉성문여>라는 책에서 남사당에 대해 설명한 글입니다. “생명의 종류 가운데 가장 추하고 더럽다.”“천리와 인도를 상실함이 이 무리보다 심한 자가 없다.” 대체 남사당이 어떤 집단이길래 이처럼 가혹한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요?

조선의 집시(Gypsy), 사당패
남사당은 대개 남자인 꼭두쇠를 중심으로 40-50여 명으로 구성됩니다. 주로 한 군데 머물지 않고 지방 각 고을을 떠돌며 풍물(농악), 버나(사발과 쳇바퀴 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보기(가면극), 덜미(꼭두각시 인형극)의 여섯 마당의 놀이를 보여주고 돈이나 음식, 옷가지를 얻어 생활을 영위하는 집단입니다. 광대가 권력 주변에 기생하는 연희집단이라면 사당패는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면에서 다릅니다.

이들은 장인이나 상인, 광대보다도 조선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는 집단이었습니다. 이옥의 글에서처럼 사회악의 온상처럼 취급되었고,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특별한 거처가 없이 등짐을 지고 유랑 생활한다는 점에서 서양의 집시처럼 자유로운 영혼들이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연희를 구경하는 사람이 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애환을 위로하기 위해 백성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 말기 일종의 백과사전인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이런 유랑 놀이집단이 신라시대 때부터 있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의 사당패는 조선 중기 이후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여성 집단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사당패가 조선 말기에 이르러 남성들만으로 만들어지게 되자 이를 남사당패라고 불렀습니다. 남사당은 남색(男色)을 파는 독신 남자만의 사회집단이기도 했습니다.

리더격인 꼭두쇠 아래 역할에 따라 곰뱅이쇠(꼭두쇠를 보좌하는 사람으로 한 명 혹은 두 명이며 남사당패의 은어로 마을에 들어가기 전에 놀이판을 벌여도 좋다는 허가를 곰뱅이라고 하는데 이를 담당하는 역할을 말합니다), 뜬쇠(여섯 마당 각 분야별 책임자), 가열(뜬쇠 밑에서 공연하고 기예를 닦는 사람), 삐리(초입자. 가열이 되기 전까지 여장旅裝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합니다), 저승패(연희 기능을 상실한 늙은 단원), 매호씨(어릿광대. 공연자와 재담을 주고 받으며 흥을 돋우는 역할), 무동(어른의 어깨 위에 올라가 춤추는 여장 남자아이), 등짐꾼 등으로 위계가 구분되고 엄격한 조직규율을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단원은 가난한 농가의 아이를 받거나 고아, 가출아 등으로 충당하기도 하지만 더러 어린아이를 납치하기도 했습니다. 유랑생활이 기본이지만 추위로 공연이 힘들어지는 겨울철이면 정해진 은거지에서 신참 삐리들을 가르치거나 연습하는 기간을 보냈는데, 현재까지 이들의 은거지로 밝혀진 곳들은 경기도 안성, 진위 충남 당진, 회덕 전남 강진, 구례 경남 진양, 남해 황해도 송화, 은율 등지라고 합니다.

이 가운데 안성은 주로 가을걷이 무렵을 중심으로 걸립을 다니던 농악대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안성 현지를 붙박이로 머물면서 토박이 가락을 연주하는 집단이 있고, 이와 달리 마을의 연희자 가운데 가락이 뛰어나고 재주가 있는 사람으로 결성된 남사당 풍물놀이가 있었습니다. 또 나아가 이들 전부와는 또 다르게 전문적인 연희 활동을 하면서 전국을 유랑한 집단이 있습니다.

청룡사 아래 불당골에는 전문 연희집단인 개다리패의 근거지였습니다. 이곳에서 겨울을 나고 전국으로 돌아다녔던 사당패가 바로 바우덕이패였습니다. 이들은 청룡사에서 발행해준 신표를 들고 다니며 활동하고 겨울에 돌아올 때면 일정 정도의 시주를 청룡사에 바치는 공생관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성남사당풍물놀이는 1989년 제3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옛 명성을 되찾았습니다. 바우덕이 이후 현재까지 꼭두쇠의 명맥을 이은 계보도 있어 바우덕이­김복만­원육덕­이원보-김기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1982년 안성지역에서는 오함헌을 회장으로 하고 김기복을 상쇠로 하는 안성남사당보존회를 결성했습니다.

사찰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
사당패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또 다른 연희패가 ‘걸립패’입니다. 말 그대로 양식을 구걸하러 다니는 행위에서 따온 말로 걸립패는 목적에 따라 절걸립패와 낭걸립패로 나뉩니다. 절겁립은 절의 중수나 범종 주조 등을 목적으로 마을을 돌며 축원과 염불을 해주고 곡식을 얻어가는 연희패입니다. 우두머리인 화주(化主)를 중심으로 비나리(축원하는 승려나 승려 출신 남성), 화주나 비나리의 부인인 보살, 풍물잽이, 산이(연희단원), 탁발(곡식을 얻는 역할) 등이 한 패를 이룹니다. 이들은 반드시 절에서 발행한 신표를 지니고 다닌다는 점에서 안성 개다리패 남사당과 같습니다.

 낭걸립패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집안고사를 해 주고 돈이나 곡식을 받는 전문 연희패입니다. 마을 자체에서 소박하게 다리걸립이나 나루걸립을 벌이기도 했지만 다리나 둑을 쌓거나 공동 나루를 만들거나 서당을 짓는 등 규모가 있는 공공사업을 벌일 때는 이 같은 전문 걸립패를 불러서 돈을 모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모갑(某甲)으로 불리는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돌아다니는데 이 걸립패가 마을에 들어갈 때는 마을 입구에서 여러 가지 기예를 시연해서 그 재능을 인정받아야 마을에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사당패는 1920년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걸립패와 합쳐진 후 196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뒤 2009년 9월에 유네스코에서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최초의 여성 꼭두쇠 바우덕이
남사당패는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는 천민집단이지만 그들 나름의 규율은 매우 엄격했다고 알려집니다. 이런 남사당패에서 최초의 여성 꼭두쇠가 탄생하게 되니 바로 청룡사 아래 불당골을 근거지로 두고 활동했던 안성 개다리패 바우덕이였습니다.

남사당 바우덕이 사당과 동상

바우덕이(본명 김암덕)는 1848년 안성의 가난한 소작농 딸로 태어나 1853년 다섯 살에 안성 청룡사 불당골 남사당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선소리, 줄타기, 풍물, 무동, 새미 등의 모든 남사당 기예를 익혀 모든 방면에서 빼어난 기량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바우덕이가 15세 되던 1863년에 당시 꼭두쇠였던 윤치덕이 죽자 단원들의 만장일치로 여성 최초의 꼭두쇠로 추대되었으며, 이로부터 두 해 뒤인 1865년에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을 중건하는 현장에서 전국의 사당패를 모아 일꾼을 위무하는 경연대회에서 참가한 사당패 중에 농악놀이를 가장 잘 놀았다는 이유로 옥관자(玉貫子)를 하사받게 됩니다.

이후로 다른 남사당패들은 바우덕이패의 깃발을 보면 깃발을 숙이는 기배(旗拜)를 올리고 전국 최고의 남사당패임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유랑 천민집단에게 정3품 당상관 이상에게나 주는 옥관자를 내린 것도 그렇지만 일개 남사당패의 나이 어린 여성 꼭두쇠가 전국적인 인물로 부각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우덕이는 우리나라 연예사에서 첫 번째 스타였습니다. 그것도 왕실이나 양반사회에서 주로 연희를 하던 전문광대집단에서가 아니라 백성들의 생활 현장을 유랑하며 그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남사당패에서 백성들의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 되는 스타가 탄생한 것은 그 자체가 우리나라 대중연예사가 바우덕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의미를 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는 남사당 신분이요 골깊은 차별의 대상이었던 여성으로서 자신이 처한 신분적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바우덕이는 자신을 보러오는 백성들에게 희망과 용기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바우덕이는 이후 1865년~1870년까지 안성을 중심으로 경기북부와 멀리 북간도, 일본의 대마도까지 불려 다니며 지금의 K-Pop이나 아이돌처럼 국제적으로 지명도를 넓혀 나갔습니다. 이제 안성 남사당패는 통칭해서 ‘바우덕이패’로 불릴 만큼 그 중심에 어린 여성 꼭두쇠 바우덕이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전국으로 불려 다니던 바우덕이는 1870년 23세의 꽃다운 나이에 폐병에 걸리게 됩니다. 다시 안성 청룡사 불당골로 돌아온 바우덕이 곁을 지킨 사람은 20세 가까운 나이 차이에도 지극히 그녀를 아껴주었던 남편 이경화였다고 전합니다. 남사당이었던 남편 이경화의 극진한 간호에도 끝내 그녀가 숨지자 이경화는 바위에 올라가 애절한 장구와 피리소리로 조선 최고의 꼭두쇠였던 바우덕이의 죽음을 세상에 알렸다고 합니다.

처음엔 불당골 어딘가에 무덤을 만들어 묻었다고 전해졌으나 이후 흔적을 찾지 못하다가 안성유지들이 나서서 버려진 바우덕이 묘를 찾아내어 허물어 내린 봉분은 흙을 더 쌓아주었고 없었던 무덤 날개도 마련해 주고 제를 올릴 수 있도록 제단석도 갖추었습니다.

바우덕이 무덤

최초의 여자 꼭두쇠인 바우덕이를 기념하는 축제가 매년 가을이 되면 경기도 안성에서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축제’가 열립니다. 그의 무덤가에 세워진 비석에는 이 지역에서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전설적인 인물 바우덕이를 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

남사당패를 품어준 사찰
서운산 자락에 파묻힌 절 청룡사는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의 배경이 된 사찰입니다. 이곳을 근거로 전국을 떠돌던 남사당패가 조선후기 농민봉기의 한 축을 담당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실제 청룡사 바로 아래 마을인 불당골은 불과 20-30년 전까지만 해도 과거 남사당패에 몸담았던 예인들이 살았던 마을이었습니다. 그들은 각종 매체에서 취재를 하러 오면 극도로 인터뷰를 꺼렸습니다.

사회로부터 천대받고 격리되다시피 이곳에 모여 살던 남사당패에게 청룡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자신들만의 원찰이었습니다. 전국을 떠돌다가도 추위가 닥치는 겨울이 되기 전 돌아와 안기는 마음의 고향 같은 절이었습니다.

 청룡사는 고려 원종 6년인 1265년에 명본스님이 창건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고 부르다가, 공민왕 13년인 1364년에 나옹스님이 크게 중창하면서 이름을 청룡사로 바꾸게 됩니다. 나옹스님이 이곳을 지날 때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이 원찰로 삼아 불사를 후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청룡사는 다른 대찰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지 다섯 점의 보물과 세 점의 지방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먼저 자신이 만든 범종 전체가 보물로 지정된 비구 사인스님의 동종이 법당 안에 있습니다. 사인스님은 조선 후기인 18세기 스님으로 신라 종의 전통에 자신만의 특징을 추가해서 그가 제작한 8 구의 동종이 모두 보물로 지정된 인물입니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우선 크기는 비교적 작지만 그의 초기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포항 보경사 서운암동종(보물11-1)은 종신에 보살상이나 명문이 아닌 불경의 내용을 새긴 것이 가장 큰 특징이며, 양산 통도사동종(보물11-6)은 팔괘(八卦)를 문양으로 새기고 보통 유곽 안에 보통 9개씩의 유두를 새기는 것에서 벗어나 단 한 개만을 중앙에 새겨 넣었다. 또한 가장 전통적인 신라 범종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범종으로는 안성 청룡사동종(보물11-4)과 강화 동종(보물11-8)이 있다. 그밖에 종을 매어 다는 용뉴 부분에 두 마리 용을 조각해 둔 서울 화계사동종(보물11-5)과 의왕 청계사동종(보물11-7), 그리고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그만의 독특한 모습으로 표현한 문경 김룡사동종(보물11-2)과 홍천 수타사동종(보물11-3) 등이 그가 제작한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우수성을 인정받아 8구 모두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각기 독창성이 엿보이고 있어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위키 백과》

청룡삳 동종

사인스님의 동종 가운데 청룡사 동종이 신라 종의 외형을 그대로 따른 전통을 고수한 작품이라면, 보물 제824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은근한 파격을 맛볼 수 있는 건축입니다. 정면에서 볼 때는 여느 법당과 다를 바 없지만 옆면과 뒷면으로 돌아가면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 나옵니다. 제멋대로 춤추듯이 비틀거리고 있는 기둥들 때문입니다. 아마도 춤추고 노래하는 남사당패 예인들의 원찰이어서 그런 걸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집 전체가 흔들거리는 착각에 빠지는 듯합니다.

청룡사가 남사당패의 근거사찰인 것은 절 입구 길 중간에 서 있는 사적비에도 드러나지만 사인스님이 제작한 동종이나 지금은 수장고에 보관중인 감로탱의 시주질, 인로왕보살 대신 뱃전에 뱃사공이 노를 들고 서 있는 반야용선도 등 곳곳에 알듯말듯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청룡사가 남사당패를 보듬었다면 남사당패는 청룡사 불사의 최대공로자였습니다. 1674년에 조성된 청룡사 감로탱의 시주질에 ‘박동질이’라는 사당패 예인의 이름이 보입니다. 사인스님이 만든 청룡사 동종에도 시주자 명단 중에도 예인인 듯이 보이는 ‘정어질산’이란 이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절 입구에 세워진 ‘청룡사중수사적비’에는 아예 시주자 이름 앞에 ‘사당’이나 ‘거사’를 드러낸 사당패 시주자들의 명단이 있습니다.

숨겨진 이야기 꺼리 중 또 하나가 바로 청룡당이라는 요사채 전면에 있는 현판입니다. 죽농(竹儂) 안순환(安淳煥)이 ‘청룡사’라고 쓴 현판인데, 안순환은 조선왕조 마지막 대령숙수(待令熟手, 궁중요리사)로 구한말 최고의 요리집인 명월관의 설립자이며, 공연단체인 원각사를 설립하기도 한 사람입니다. 해강 김규진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전국 유명사찰에 글과 그림을 남겼습니다.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를 설립한 그가 이곳 청룡사를 찾아 글씨를 남긴 것도 이곳을 근거로 활동한 남사당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청룡사를 나와 왼편으로 돌아가면 근래 안성시에서 세운 바우덕이 사당이 있습니다. 마당에 소고를 든 바우덕이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빛이 애절한 느낌입니다. 이곳에서 2.5킬로미터 청룡저수지를 지나 양지바른 산언덕 위에 바우덕이의 묘가 있습니다. 비석 한 면에 앞서 소개한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로 끝나는 이 지방 구전민요처럼 안성 청룡 바우덕이는 바람 날리며 떠나가 이곳에 잠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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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이 2018-11-06 15:34:06

    대웅전 기와 탁본하러 갔다가.. 뼈대만 남은 대웅전 보았습니다. 기둥을 보고 감탄이 절로나옵니다.   삭제

    • 철호 2018-10-31 20:20:36

      정말 재미있고 단숨에 읽어지는 글입니다.
      유익한 정보와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삭제

      • 혜의 2018-10-28 08:10:31

        황찬익선생님은 조직력과 응집력 있게 글을 잘씁니다.
        그러나 이 글은 문화답사의 글이고 청룡사 동종 사진 옆의 글을 보면
        "정면에서 볼 때는 여는 절과 다를 바 없지만 옆면과 뒷면으로 돌아가면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 나옵니다. 제멋대로 춤추듯이 비틀거리고 있는
        기둥들 때문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청룡사의 대웅전 옆면 뒷면이 어떻게 생겼기에
        글쓴이가 아!라는 감탄사까지 날리는지 사진이라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이 없기에 2%로 부족한 글이라 댓글을 달았습니다.
        황선생님! 고맙습니다.   삭제

        • 지나가다가.. 2018-10-27 22:12:21

          좋은 글입니다.
          사진이 없어도 100% 만족할 만한 내용이군요.   삭제

          • 황찬익 2018-10-27 19:51:34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현재 해체보수 공사 중이어서 아쉽게도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삭제

            • 혜의 2018-10-27 15:32:05

              글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대웅전의 옆면과 뒷면 사진도 올려주었으면 저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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