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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창고 꼬삼비[연재] 허정스님의 부처님을 따라 거닐며_22
  • 허정_전 천장사 주지
  • 승인 2019.05.0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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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삼비는 부처님이 성도후 9년째와 10년째 안거를 지내신 곳이다.그러나 꼬삼비하면 떠오르는 것이 꼬삼비에서의 승가불화이고 그 문제를 해결한 용기있고 현명한 꼬삼비 시민들일 것이다. 출가자 혹은 성직자들이 타락하거나 분쟁할 때 재가자라 부르는 외부세력이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가 어떻게 화합하게 만들 수 있는가하는 희망의 기록이 꼬삼비에 있다. 부처님의 간곡한 타이름마저 받아들이지 않아서 급기야는 부처님마저 떠나게 만든 승가였지만 재가자가 똘똘뭉쳐서 인사하기를 거부하고 공양하기를 거부하여 마침내 스님들을 정신차리게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적폐청산을 원하는 오늘날의 의식있는 재가자들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이곳을 순례하고 싶을 것이다.

처음 꼬삼비에 왔던 것이 2005년이니까 이번 방문은 14년만이다. 그때에도 허허벌판에 서있는 아소카석주를 보았고 움막집에사는 가난한 이들을 보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은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야무나 강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앉아있던 일이다. 그 바람의 느낌 때문에 나에게 꼬삼비는 하염없이 강을 바라보고 싶은 곳으로 남았다. 그 분위기를 다시 느끼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혼자여야 할 것이다.

가야역에서 아침 6시30분에 출발한 기차는 오후 1시에 알라하바드역에 도착했다. 수십만명이 모이는 꿈부멜라 축제가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런지 기차역 주변은 가건물과 펄럭이는 깃발로 어수선하다. 점심을 먹으려고 역주변 식당을 둘러 보았지만 마땅한 식당이 보이지 않아 마음속에 두고 있던 알라하바드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 근처에는 식당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 밥먹는 것을 생략하고 알라하바드박물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앞사람이 50루피를 건네는 것을 보고 나도 50루피를 내밀었다. 매표원은 나를 쳐다보더니 아유 인디언?하고 물었다. 나는 약간 당황하며 예스!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그도 웃었다. 인도인 둘이 영어로 묻고 답하며 인디언임을 확인하는 상황은 분명 코메디이다. 그의 웃음은 너가 인디언 아닌거 내가 알거든! 이라는 웃음이었지만 나는 그 순한 웃음을 뒤로하고 당당하게 입장하였다. 다른 곳 같으면 여권이나 인도인의 주민등록증인 아르달 카드 보자고 했을 테지만 그들은 나를 순순히 통과시켰다. 배낭을 가지고 입장할 수 없으니 보관소에 맡기고 가라고 경찰관이 말할때에도 내 얼굴에는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알면서 속아주는 인도인들의 여유로움에 갑자기 이곳 알라하바드가 좋아졌다. 티켓을 확인해보니 외국인 입장료는 200루피였다. 코삼비에서 돌아올 때 사진을 찍기위해서 박물관을 다시 들렸다. 매표소에서 200루피를 내밀었는데 직원은 나에게 150루피를 거슬러주었다. 내가 회색승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현지인 취급을 받은 것이다. 외국인이 거의 오지 않기에 말만 안하고 서 있으면 십중팔구 현지인 취급을 받게 되는 것 같다.

야무나강

알라하바드 박물관은 기대한 것보다 볼거리가 풍부하다. 제1 전시실에는 꼬삼비에서 출토된 아소카석주 상륜부와 불상, 바후르뜨에서 가져온 불상과 탑 주위에 설치되었던 담장 조각들, 가야지역에서 나온 불상 그리고 간다라지역의 아름다운 불상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뜻하지 않게 눈 호강을 하여서인지 점심을 걸렀어도 배고프지가 않았다. 제2전시실에는 16세기이후에 제작된 힌두신 조각상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이 힌두교신들의 조각상들이 꼬삼비에서 출토되었으니 꼬삼비가 한동안 힌두교성지가 되었었다는 걸 짐작할수 있겠다. 꼬삼비의 흥망성쇠를 아소카석주가 홀로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인도독립운동을 보여주는 사진이 전시되고 있는 2층에 올라가니 뜻밖에도 몇십만년전에 살았던 맘모스 뼈와 인더스문명이 시작된 하랍파와 모헨조다로에서 나온 유물들이 보인다. "정말, 인도는 유물이 넘치고 넘치나 보다!"라는 생각이 든다. 밧데리가 없어 사진을 못 찍었기에 꼬삼비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전시실을 나오는데 오른쪽에 도서관이 눈에 띄었다. 

꼬삼비 유적에 대한 책을 보고 싶다고 물으니 신문을 보고있던 직원이 의자를 내어주며 친절하게 맞아준다. 이분은 자기도 심정적으로는 불자라고 말하는 와만(Waman)박사다. 그의 고향은 암베드까르가 오십만명을 개종시킨 도시 낙뿌르라고 했다. 그는 꼬삼비에서 출토된 유적은 이곳보다 알라하바드 대학내에 있는 꼬삼비박물관에 더 많다고 알려주었다. 갑자기 대학박물관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지만 꼬삼비에 가려면 시간이 촉박하다. 숙소를 찾기 어려운 도시에서 벗어나 사찰에서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박물관에 가는 대신 텍시를 불러 꼬삼비로 향했다. 와만은 꼬삼비에 있는 스리랑카사찰의 주지가 자신의 친구라며 그곳에 잘 수 있도록 전화를 해 주었다.

왕궁에서 바라보는 야무나강
고시따아라마를 순례하는 불자들

우연히 만난 그의 친절에 감동하는 마음이 식기전에 그가 불러준 택시는 스리랑카절에 당도했다. 스리랑카 절의 위수디 주지스님은 내가 온다는 전화를 받았다며 반겨주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오늘밤 스리랑카 순례자 200명이 숙박을 하게 되어서 근처의 자이나교 템플에서 하룻밤 잘 수 없겠냐고 물었다. 나는 자이나교템플에 자는 것은 오히려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고 대답했고 주지스님의 명령을 받은 오토바이 하나가 나를 자이나 템플에 데려다 주었다. 숙소는 깨끗하고 조용하여 하룻밤 머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꼬삼비는 불교유적지이지만 자이나교 성지이기도 하다. 마하비라가 이곳에 온적은 없었지만 자이나교에서 말하는 24성인 중에서 6번째 나타난 성인이 이곳에서 출생했다고 전해오고 있어 자이나교템플이 많다. 캄보디아템플 맞은 편과 남쪽에 신축되는 내가 하룻밤 머문 자이나 템플은 호화롭고 정교하게 돌을 깍아 신축중이다. 저 정도로 정교하게 돌을 깍아지으려면 일반 승원을 짓는 비용의 몇 배가 들것이다. 이들에게는 인생이 허무하니까 유한하니까 템플만큼은 정교하게 최선을 다해서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는 듯하다.

아침을 먹으면서 주지스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특이한 것은 공양간이 따로 있지 않고 사무를 보는 그 책상위에 나그네를 위해 주섬주섬 음식을 차렸다. 나는 밥상에서 음식을 먹는데 정작 그는 바루에 음식을 담아 사무실 안쪽에서 공양을 했다. 밥먹으면서 서로 얼을보며 대화하기에 불편함이 없는거리였다. 그는 바라나시 힌두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상카사에서 몇 년 살다가 14년전에 이곳에 와서 사찰을 지었다. 하루에 200명이 머물 수 있는 숙소를 갖추었고 사찰근처에 영어로 교육하는 초등학교를 운영한다. 학생들에게 교재와 교복은 물론 점심까지 무료로 배급하기에 이 학교에 입학하려는 경쟁이 매우 치열하단다. 주위에 다섯 개의 마을이 있는데 한 마을에 5명만 입학할 수 있고 한 가정에 1명만 입학 할 수 있다.이 학교가 생기기 이전에는 30% 정도의 학생들만 학교에 다녔는데 이 학교가 생긴 이후로 지역의 아이들 90%가 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백명의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보여주는 아침조회는 희망의 메아리이다. 하얀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박력있는 체조를 시작으로 삼귀의를하고 교가를 합창한다. 내가 꼬삼비에 머무는 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이 공부하는 소리,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성안에 있는 아소까 석주
스리랑카 사찰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 교실

꼬삼비도 다른 성지와 마찬가지로 보여줄만한 것들이 별로 없다. 그러나 이곳은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코끼리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우데나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 과정과 웃제니의 왕에게 포로로 잡혔지만 공주를 꾀어내어 탈출하는 이야기, 고사까가 일곱 번이나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 재정관이 된 이야기, 사마와띠 왕비를 질투한 마간디야 왕비가 왕비와 오백명의 궁녀들을 태워죽이고 그 과보로 처참하게 죽게되는 이야기, 곱추하녀 꾸줏따라가 왕비와 궁녀들을 교화한 이야기. 야무나 강에서 씻기우던 아이를 거대한 물고기가 삼켜버렸는데 갠지스강에서 어부에게 잡힌 물고기 배를 갈라보니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나왔다는 바꿀라존자이야기등 오늘도 유유히 흐르는 야무나강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끝이없다. 이런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조각상으로 되살려내면 학생들과 순례자들이 매우 좋아할 것인데 마침 조각상을 만드는 일을 이곳 주지스님이 지금 진행하고있다. 도량 한켠에는 우데나왕, 사마와띠왕비, 하녀 꾸줏따라, 와술라닷따왕비, 미간다야왕비, 고사까재정관, 삔돌라바라드와자등과 같은 인물들이 스리랑카 조가가에의해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자전거를 빌려타고 아소카 석주를 참배했다. 아소카 석주는 허허벌판에 외롭게 서있는데 석주 앞에는 승원터가 있다. 아마 꾸꾸따아라마 아니면 빠와리까아라마 일것으로 추정된다. 고시따아라마는 꼬삼비 성벽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왕궁과 대조된다. 고시따아라마가 성안에 있다는 사실은 우데나왕과 고사까재정관의 관계가 얼마나 돈둑하였는지 알수 있게한다. 이 승원에서 강사와 율사스님들간에 분쟁이 있었고 대중공사를 하여 징계를 주는 바람에 싸움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고시따아라마 입장에서는 이렇게 승가불화의 장소만 기억되는게 억울할 수도 있겠다. 고시따승원이나 왕궁은 야무나강이 바라보이는 위치에 있지만 지대가 높아 홍수피해가 없었을 것 같다. 특이한 것은 고시따승원옆에는 물관리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소규모의 댐이 있다는 것이다. 물이 잘 흐르도록 벽돌을 경사지게 쌓았는데 아래로 내려오면 수로도 만들어 놓았다. 비가오면 이곳에 물이 모이고 그물을 관리하여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꼬삼비의 풍요로움은 이렇게 물을 잘 관리하는 것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자전거를 타고 마을안으로 진입했다. 동네 어른들과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주고 맑게 미소짓는다. 14년전에 왔을때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 막다른 곳에 이르자 발아래 강이 보인다. 꼬삼비는 야무나강을 한 축으로해서 타원형의 토성으로 둘러쌓여 있는데 아찌라와띠강을 끼고 있는 사왓띠와 닮아있다. 야무나강은 평상시에는 식수나 생활용수로 사용되고 유사시에는 적군을 침입을 막는 해자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야무나강 서쪽끝에 위치한 왕궁은 아직도 돌을 다듬어서 쌓은 성벽이 남아있다. 동서남북으로 설치되었던 전망대의 흔적도 보인다. 이곳에서 사마와띠 왕비와 오백명의 궁녀들이 마간디야 왕비의 모함으로 불에 타 죽었다. 왕비와 궁녀들은 평상시에 시녀 쿠줏따라의 법문을 많이들었고 부처님을 대신해서 수시로 왕궁을 방문하는 아난다존자의 법문을 들었기에 수다함 이상의 경지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에 타 죽는 순간에 사마와띠 왕비가 궁녀들을 타이르는 언어는 깊은 탄식과 아울러 깊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을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일체지로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길고 긴 윤회 속에서
얼마나 많이 불에 타 죽었는지를.
그러니 순간 순간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 차리십시요.
고통스런 순간에도 그 고통에 반응하는 마음을 정확히 관찰하십시요.

성밖에서 바라본 꼬삼비 토성
물관리를 위해 설치된 구조물

야무나강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어부의 배를 빌려 강에서 왕궁을 바라보았다. 파괴되어 흔적만 남은 왕궁의 형태가 아침안개가 피어오르는 강물속에 비추어진다. 저 높은 난간에서 왕과 왕비들도 많은 날들을 이 야무나강을 바라보았으리라. 발가벗고 수영하는 아이들과 물소들, 빨레하는 아낙네들, 강 건너 마을에서 풀을 베어오는 아낙네들의 행렬이 그림속의 풍경이다. 왕궁터는 강에서 수영하던 아이들이 몸을 말리거나 모닥불을 피워 잡은 고기를 구워먹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주고 있다. 아이들은 강에서 잡은 새끼 손가락만한 물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며 한 마리를 권한다.

이틑날 새벽에도 이 왕궁을 보러갔었는데 동네 아주머니 처녀들이 왕궁쪽으로 소변과 대변을 보러나와 난감했다. 가운데 있는 마을에서 서쪽인 왕궁쪽이 여자들이 용변을 보는 곳이고 마을에서 동쪽인 고시따아라마쪽은 남자들이 용변을 보는 듯 했다. 삼삼오오 모여서 물병을 들고 수다를 떨면서 들판으로 향하는 활달한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편리함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유유히 흐르는 야무나강에서 펼쳐지는 인도인들의 일상은 2600년전의 일상과 다를바 없겠다.

허/정/스/님/의/부/처/님/을/따/라/거/닐/며
불교포커스 여시아사(如是我思)

벌써 4번째 인도성지순례다. 인도의 기후와 도로 사정 등은 순례자에게 만만치 않지만 성지순례를 시작하는 가슴은 늘 설렌다. 스승의 발걸음을 쫓는 일은 매번 새로운 발견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첫 순례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돌아다녔기에 고생한 기억밖에 없다.

두 번째는 그래도 책을 들고 꼼꼼히 찾아 다녔다. 정보가 많지 않아 크게 느낀 것은 없고 다만 부처님의 열반지에 가서 우울증 같은 걸 겪었다. 세 번째는 나를 포함한 스님들 여섯 명과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며 경전을 읽고 토론하는 성지순례를 했는데 그 때가 가장 의미 있었다. 그런데 그 순례도 중간에 순례자 한명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바람에 미완의 순례가 되고 말았다.

이 번에는 많은 시간을 가지고 홀로 떠났다. 성지순례후기까지 쓸 작정을 하고 와서 그런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성지를 알게 되었고 잘 안다고 생각했던 성지에서도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번 성지순례에서 느꼈던 소감을 공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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