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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존재론과 성물의 의미
  • 도태수_한국학중앙연구원
  • 승인 2021.06.2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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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사진출처 : 도태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종교문화연구소)

[프롤로그]

   봉천동 관악산 북쪽 기슭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상봉약수터가 나온다. 낙성대 공원에서 시작해서 40분가량 쉼 없이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만만치 않은 공간이다. 숨을 돌리며, 지는 석양을 먼발치에서 볼 수 있는 운치마저 없으면, 이렇게 노고를 들여 올수나 있을까? 석양을 보며 땀을 식히다 보니 작은 푯말이 보인다.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奉天洞 磨崖彌勒佛坐像) 가는길”, 몇 차례 산책 삼아 트레킹 한 장소지만 이 푯말을 찾은 것은 처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작은 오솔길에 큰 바위를 돌아가는 길이라 쉽게 눈에 띄는 길이 아니다. 여러모로 궁금하기도 하고 사적이라 하니, 오솔길을 따라 바위를 돌아 ‘은밀하게’ 감추어진 마애불상을 만나러 간다. 잠깐을 내려가다 돌아서는 길 맞은편에 안내판이 정면으로 보인다. 그 오른쪽으로는 숨겨진 넓은 바위벽이 있고, 세월의 흔적으로 희미하지만 정치(精緻)하게 새겨진 멋스러운 마애불상이 보인다.

 이 마애불상은 17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가로 5m, 세로 6m로 큰 절벽 바위면에 얕은 돋을새김으로 유려하게 조각되어있다. 특히 하나하나 섬세하게 그려진 옷의 곡선과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부처의 표정 등은 예사 조각과는 다른 미적 풍모가 드러난다.

 이 조각을 ‘누가’, ‘왜’, 그리고 ‘여기에’ 새겨놓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솜씨 좋은 석공이 특정한 의미를 위해, 이 은밀한 장소에서 많은 시간과 노고를 드렸겠다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일상성을 넘어서는 비범한 재주와 특별함을 더해 주는 장소의 은밀함, 이 마애불상에는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인위적 인공물로서 성물의 ‘의미’가 담겨 있다.

[물질적 전회]

  근대적 이원론은 인간과 사물을 구분하고,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으며 물질을 인간에게 대상화된 부수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여기에 대상화된 물질은 인간중심적 사고에 의해 수동적인 객체로 전락하고 개별적인 독립성은 인정받지 못한다. 한마디로 물질은 독립된 범주로 인정받지 못하고 ‘인간(humans)’과 ‘비인간적인 것(non-humans)’의 이원적 범주에 고정되어 엄격하게 분리된다.

  이런 근대적 이원론의 인간중심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는 인간과 물질의 상호관계성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한다. 물질은 능동적 행위주체인 인간에 의해 다루어지고, 활용되는 수동적 객체이지 그 자체로 능동적인 행위주체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물질적 전회는 이러한 인간과 물질의 이원론적인 단절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즉 인간과 비인간적인 것 사이의 상호관계를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혼종성(hybrid)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브르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연결망이론(Actor-Network Theory:ANT)은 인간과 비인간적인 것, 다시 말해 인간 이외 것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 혹은 상호관계에 주목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자 간의 수평적인 상호작용이다. 이 이론의 특징은 행위자가 인간만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적인 것에도 동일하게 적용한다는 점이다. 즉 인간과 비인간적인 것의 상호작용은 상대적 변화를 일으켜 양자 모두를 행위주체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이런 행위주체의 가변성이 라투르가 말하는 혼종성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인간과 비인간적인 것의 상호교차 혹은 상호작용을 통한 상태변화의 혼종성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마릴린 스트래선(Marlyn Stranthern)은 다른 맥락에서 물질의 사회화 과정을 말하고, 인간성(personhood) 분배(distribution)에 관해 이야기한다. 먼저 스트래선은 상호인공적인 영역(inter-artefactual domains)을 가정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물질 사이의 비유를 교환하고 만들어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스트래선은 이 영역에서 인간의 주체와 객체가 구별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는 물질들 사이에서 비유를 교환하는 과정에서 인간성이 물질에 분배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기서는 인간이 개인(individual)이 아닌 ‘분리된 것’(dividuals)으로 대상화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인간성 분배의 과정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적인 것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물질에게 분배된 인간성은 물질과 인간의 상호침투의 과정이며, 둘 사이의 가변적인 상태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이론과 스트래선의 인간성 분배 이론은 물질과 인간을 엄격하게 구분하던 이원론적 구분을 해체하고, 물질과 인간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침투하는 관계임을 보여준다.

[물질의 존재론: 물질의 일대기 그리고 물질의 효과]

 이제 물질은 인간에게 종속된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인간에게 끊임없는 영향을 미치는 능동적 주체로서 등장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전까지 눈여겨보지 않았던 물질을 가만히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사물의 미세한 움직임이 보이고 그에 따른 궤적이 보인다. 인간의 삶의 궤적과 순환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물질의 생의 궤적을 분석하기 때문이다.

 물질은 그 자체로서 의미의 변화뿐만 아니라 형태의 변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사물은 부패하기도 하고 쪼개지기도 하며, 오랜 시간을 그 자리에서 잔존하기도 한다. 이 모든 변화가 물질의 형성과 변화의 과정이며, 이러한 과정의 지난한 역사가 물질의 일대기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과정이 인간의 문화에 상호침투하면서 ‘물질의 문화적 일대기’(cultural biography of objects)가 된다. 이는 다른 말로 물질의 ‘역사적 삶’(life of history)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이 일대기를 갖는다는 것은 물질이 단순히 고정된 객체가 아니라 유동적이고 수행적인 대상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연대기가 문화적이고 역사적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이러한 물질의 궤적에 따라 이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질은 지속적으로 형성과 변형을 반복하는 과정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의 과정이 인간 문화와 상호관계를 맺으면서 하나의 ‘사건’으로 인지된다.

 하지만, 이러한 물질의 변화의 과정은 지극히 모호하고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된다. 물질의 변화 과정이란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체감의 속도보다 훨씬 늦게 움직인다. 이런 물질의 변화를 가리켜 물질의 ‘완만한 변화’(humility of change)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사물의 역사를 관찰하고 인지하기 위해서는 물질, 그 자체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물질과 사회적 관계를 통해 물질을 극단적으로 사회화하는 경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방법론적 물신주의’(methodological fetishism)를 채택해야 한다. 이는 물질 변화의 궤적에 집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물질을 최우선에 놓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물질,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것은 물질이 미치는 ‘효과’를 인지하기 위해서이다. 물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통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며, 인간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한다. 그러한 통로는 사물의 속성에 기초한 ‘행위유발성’(affordance)에 기초하고 있다. 이 행위유발성은 유기체로 하여금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성질이다. 예를 들어, 사과의 빨간색은 사람으로 하여금 따 먹고자 하는 행동을 유도한다. 이는 특정한 물질의 이해가 인간의 사회적 맥락에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성격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설명한다.  

 물질은 우리 일상에 ‘가만히’ 존재한다. 물질은 그 자체의 성격에 주목받지 못하고 인간중심적 시각으로 인해 눈에 띄지 않고 일상에 감춰져 있다. 하지만 물질은 일상에서 자신의 궤적을 가지고 형성과 변동을 반복하고, 인간은 그런 물질의 궤적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물질의 ‘효과’를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따라 우리는 일상에 존재하는 물질에 주목해야 한다. 즉 물질이 형성과 변화를 반복하는 수많은 순간에 주목해야 하고 그러한 형성과 변화의 효과가 발현되는 ‘현장’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현장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효과를 ‘수행’하는 물질에 개입하고 실천하면서, 물질과 우리의 관계를 탐색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에필로그]

   물질은 일상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며, 또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이자 효과이다. 그래서 인간과 물질의 상호관계를 살펴보기 위해서 물질과 인간이 만나는 일상적 현장에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마애불상이 존재하는 현장은 일상적이지 않다. 더욱이 완만한 변화가 반복되는 자연적인 공간도 아니다. 마애불상은 완전히 인위적이며, 철저하게 비일상적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마애불상의 역사에 개입해 들어가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물질성’과 ‘문화’의 상호관계성에 대해서 파악해야 한다. 물질성은 물질이 존재하는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으며, 문화는 인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물질성은 우리에게 구조적 일관성을 제시하지만, 문화는 행위의 다양성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물질은 우리에게 일관된 구조로 제시되지만, 인간은 그러한 물질적 구조 속에서 다양한 행위성을 이끌어낸다. 따라서 우리가 ‘물질문화’를 통해 물질을 이해한다는 것은 물질과 인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이고, 그 결과적 다양성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마애불상은 특정한 의미가 덧씌워진 성물이다. 즉 종교적 대상이 된다. 이는 종교적이라는 인간의 행위가 덧붙여진 상태의 문화적 행위인 것이다. 이에 따라 예사 물질적 대상을 보는 것과는 다른 차별적 맥락을 고려해야 하며, 그로 인한 ‘의미’ 탐색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인위적이고 비일상적인 대상으로서 성물의 의미에 주목하고, ‘물질문화’의 관계성에 주목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글은 한국종교문화연구소 뉴스레터 683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쓴이 도태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의 논문으로는 <근대적 문자성과 개신교 담론의 형성>, <근대 소리 매체(라디오, 유성기)가 생산한 종교적 풍경>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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